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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현의 과학적 설계-아름다움에 “탄성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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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현의 과학적 설계-아름다움에 “탄성 절로”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2.18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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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윤증 고택’ 탐방기

조선후기 청백리 ‘명재 윤증’이 지어
채광-통광 잘돼 300여년 지났어도
어느한곳 파손없이 그모습 그대로

사랑채 ‘비밀의 문’ 고택서 가장눈길
큰 인공연못-느티나무등도 ‘볼거리’

충남 논산에 있는 ‘윤증 고택’은 중요 민속자료 제190호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제 윤증 고택을 찾은 이들은 그 아름다움과 과학적 구조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현재의 전반적인 건축양식은 19세기 전반기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돼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해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윤증 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면서 실제 윤증의 후손이 지금도 이 집에서 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민속자료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 선생 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해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했다. 

명재 윤증은 조선 후기 소론 계열의 대학자였다. 여러 차례 임금의 교지를 받았지만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 ‘백의 정승’이라고 불렸던 학자다. 그의 고택이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 배롱나무가 심어진 연못과 어우러진 사랑채의 운치가 빼어난 한옥이다.

보통 건축문화재를 본다고 하면 건물 밖에서 건물 안을 보게 된다. 그러나 윤증 고택은 안에서 밖을 내다봐야 제대로 보게 되는 한옥이다.

평생을 방 2~3개짜리 초라한 집에 살던 스승이 안타까워 제자들이 지었다는 이 집은 멋스러움이나 풍류만으로는 해독되지 않는다. 고택의 비밀스러운 진면목은 집안에 들어 쓰다듬고, 매만지며, 밖을 내다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첫 번째 비밀은 비틀어진 집의 앉음새에 대한 것이다. 한옥 안채의 처마와 창고로 쓰이는 곳간 채는 나란히 놓이지 않았다. 북쪽은 두 채의 건물이 처마가 붙을 듯 가깝고, 남쪽은 처마 사이가 멀다.

왜 이렇게 건물을 삐뚤어지게 앉혀 놓았을까. 고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윤증의 13세손인 윤완식씨(건물의 현재 소유주)는 “건물 사이가 좁은 쪽에 서 보라”고 권한다.

남쪽 넓은 건물 사이 공간으로 들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속도가 빨라진다. 겨울이면 북풍이 좁은 건물 사이에서 넓은 쪽으로 불어 바람 끝이 유순해진다.

유체는 좁은 통로를 흐를 때 속도와 압력이 증가하고, 넓은 통로를 흐를 때 속도와 압력이 낮아지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그렇게 바람이 빠른 곳의 곳간 채 북쪽 끝은 ‘찬광’이다. 통풍이 좋고 차갑게 보관해야 할 것들은 모두 이 찬광에 넣어두었다. 무려 300여 년 전 이 집을 지은 이가 과학적 원리를 알았을 턱이 없지만, 오랜 경험과 정성으로 집안의 바람 속도까지 제어할 줄 알았던 것이다.

두 번 째 비밀은 시선에 대한 것이다. 고택의 안채는 ㄷ자형이지만, 터져있는 부분도 안행랑채가 막아서 실제로는 ㅁ자형이다. 그래서 안채의 대청마루에 앉으면 사방이 막혀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곳에 앉으면 놀랍게도 밖이 훤히 보인다. 안채로 드는 문 앞의 내외 벽은 바닥에서 30㎝정도의 빈 공간을 두었다.

그 틈사이로 드나드는 이의 신발이 보인다. 비단신을 신고 오는지, 짚신을 신고 오는지,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틈사이로 신발만 보고 알 수 있게 해놓았다.

또 건넌방의 안쪽과 바깥문을 열어놓으면, 열린 두 개의 문을 통해 절묘하게 사랑채 뒤꼍으로 드는 문이 눈에 들어온다. 안채의 깊은 대청에 앉아서도 이쪽으로 누가 들고, 누가 나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안채의 방에서는 사랑채에 딸린 뒷간(화장실)으로 가는 길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사랑채를 찾아 오래 기거하는 남정네들은 뒷간 출입을 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여자들이 이쪽만 보고도 누가 머무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놓은 배려다. 안채의 ‘시선’에 좀 과장을 보태자면 마치 폐쇄회로 TV의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세 번 째 비밀은 문이다. 고택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단연 사랑채다. 3대가 기거하도록 만든 사랑채 누마루의 창은 대화면TV와 같은 정확히 16대9의 비율이다. 이쪽으로 고택 앞의 마당과 연못 쪽을 내다보면 배롱나무와 들판이 대화면에 꽉 차게 들어온다. 사랑채에서 어떤 창이나 문을 열어도 한 폭의 그림이다.

마당 쪽으로 난 창이나 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안채 쪽으로 난 창을 열어도 조형적인 담벽과 굴뚝들이 기막힌 그림을 선사한다. 창을 열면 보이는 나지막한 굴뚝이 왼쪽으로 치우쳐져 구도가 뛰어나다. 굴뚝을 내면서도 창으로 보이는 조형적인 구도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그림이 딱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

사랑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른바 ‘미닫이 여닫이문’이다. 4쪽으로 된 미닫이 창호문을 양옆으로 드르륵 밀어 연 뒤, 문을 툭 밀면 여닫이문처럼 활짝 열린다. 마치 아파트의 ‘확장된 베란다’처럼 트인 공간이 돼버리는 것이다. 문의 형태를 뜯어보자면 무릎을 칠 정도로 간단한 원리지만, 이런 문을 갖고 있는 집은 이곳 윤증 고택이 유일한 듯하다.

이렇듯 고택은 빼어난 아름다움과 정성이 담긴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만, 윤증은 제자들이 정성껏 지어준 이 집에 기거하지 않았다. 윤증 고택은 정작 윤증이 기거하던 곳이 아니어서 더 감동적이다. 조선후기 소론의 기초를 다진 대학자였던 윤증은 평생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초라한 집에 거주하는 스승이 송구스러워 제자들이 정성껏 집을 지어 내주었지만, 정작 윤증은 ‘큰 집이 내겐 과분하다’며 기거하던 초라한 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윤증이 ‘큰 집’이라며 들지 않겠다고 했던 집도 실상 경남 안동 일대의 으리으리한 고택에 비하면 채 반의 반도 되지 않는 규모다. 겉모양만 보자면 안채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작고 초라할 정도다.

고택에서 또 놀라는 것은 작은 제사상 때문이다. 명문가로 꼽히는 가세에 비해 제상은 일반 밥상크기에 불과하다. 추석의 차례 상에도 송편도 없고, 전도 올리지 않는다. 제사에는 탕도 올리지 않는다. 그건 윤증이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 때문이다.

이런 가풍은 누대에 걸쳐 이어져 그의 후손들은 100여 년 전부터 일가의 설날이나 제사, 생일을 모두 양력으로 쇠고 있다.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려던 대학자의 정신은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일대의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의 문중서당이 바로 종학원이다.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가 종중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이 종학에서 배출된 대과 급제자만 42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1999년부터 4년여에 걸쳐 원형을 복원한 종학원에는 종학당, 보인당, 백록당, 정수루 등의 건물이 널찍하게 들어서있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바로 누각인 정수루다. 마치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연상케하는 모습인데 계단을 딛고 오르는 만대루와는 달리, 정수루는 돋아놓은 땅을 밟고 바로 오르도록 돼있다.

정수루에 올라 내다보면 바로 가까이는 연못과 종학당 주변의 아름드리 배롱나무꽃 그리고  병사리 저수지의 물빛과 건너 마을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종학당 쪽에 서면 배롱나무 꽃과 돌담 사이로 아름다운 처마를 이고 있는 정수루의 한쪽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기가 막히다.

정수루는 한쪽이 불탄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이고, 백록당 등에서는 지금도 여름방학이면 파평 윤씨의 후손들을 모아 교육을 하는 등 활용하고 있어 보일러까지 들였다.

하지만 복원과정에서 정성껏, 그리고 솜씨 있게 마무리해 놓은 덕에 옛 맛을 크게 해치지 않아 여행자의 입장에서 참 다행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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