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9:51 (수)
‘당대 최고 예술가의 불륜’ 과연 용서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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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예술가의 불륜’ 과연 용서해야 하나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2.29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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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목사소개로 교사 이성규 만나 결혼
남편 美유학 뒷바라지위해 빚까지 내며 지원
산후조리 제대로 못하고 일하다 류마티스 발병

남편 안기영 제자 김현순과 불길한 염문 불구
피아노 팔아 생활비에 구두·예복까지 보내줘
귀국후 가정 외면한채 김현순과 음악회 강행
마지막 기대 무너진 이성규 비운의 여인으로
당대평론가 “예술가는 예술자체로 평가받아야”

사랑과 불륜 사이에는 얼마만한 간격이 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물음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사랑이 불륜이 되기도 하고 불륜이 사랑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 사랑이고 불륜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데미무어와 게리 올드만이 주연하고 롤랑조페가 감독한 영화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는 1850년에 출판된 호손(Hawthorne)의 장편소설 ‘주홍글씨’를 영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이유는 진부하고 흔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홍글씨’는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엄격한 도덕적 행위가 요구되는 목사와 언행의 정숙함이 필요한 유부녀와의 사랑을 통해 간통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홍글씨’가 관객들에게 준 감동은 불륜을 저지른 죄로 주홍글씨 ‘A’(간통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Adultery의 머리글자)를 달고 핍박과 놀림을 당하며 감옥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데미무어의 강철 같은 의지와 목사신분으로 불륜의 사랑을 나누고 죄인의 고독한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한 게리 올드만의 탁월한 연기력에서 비롯된다.

두 ‘불륜’의 주인공은 당시의 사회적 인습에 의해 단죄당해 신앙공동체로부터 배척되면서도 자신들이 믿는 신은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사랑과 불륜을 판정하는 낙인의 주체인 청교도적 규율이 불륜으로 단정짓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절대자인 신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으로 목숨을 걸고 사랑을 지키는 것이다.

‘주홍글씨’를 생각게 하는 실화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17세기 청교도적 규율보다 약하지 않은 정조관념이 지배하던 1930년대 일제 식민치하의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 이화여전 음대 교수를 지낸 안기영이 그 주인공이다.

30년대라고 해서 간통이나 불륜이 없으라는 법은 없고 안기영 말고도 뭇 남자와 여자들이 쑥덕공론의 주인공으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안기영이 7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불륜과 사랑의 논쟁에 한 척도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와 가정적 배경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안기영은 1900년 1월 충남 청양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사이에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안기영이 태어난 때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로 당시의 국내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적 윤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안기영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자식이라는 점 때문에 일단 주목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미 1925년 미국의 엘리슨화이트 음악학교에 유학해 1928년 귀국했고 이화여전 성악과 교수로 있으면서 1931년 미국의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안기영 작곡집 1,2집’을 취입했다.

콜롬비아레코드는 최근까지도 세계적인 레이블로 음반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곳이다. 안기영이 음악가로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안기영은 아내 이성규가 없었다면 완전히 무명으로 쓸쓸히 사라져갈 사람이었다. 이성규는 1899년 생으로 안기영보다 한 살 연상이며 서울 중림정 유복한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되던 해부터 교사로 일했고 윤성열 목사의 소개로 연희전문 학생이던 안기영을 처음 만났다.

이후 이성규는 대전과 개성, 창평 등으로 전근을 다니면 교사 생활을 계속했고 안기영과는 편지로 사랑을 키워갔다. 이성규의 부모는 안기영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안기영을 만나 보고는 사람이 쓸만하다며 결혼을 승낙했다.

그러나 안기영은 어렵게 중국에서 고학으로 공부하다 귀국한 1924년 이성규에게 전보를 쳐서 급히 만난다. 이성규의 기대와 달리 안기영은 “나는 집안이 몹시 가난한 만큼 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는 결혼을 할 수 없소.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없거든 다른 사람과 혼인하오”라고 선언한다.
 
이성규는 안기영이 공부를 마치고 성공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일편단심이었지만 이성규의 부모는 안기영에게 유학을 가는 것은 좋지만 미리 결혼을 하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결국 안기영은 유학을 잠시 미뤄두고 이성규와 결혼했다.

결혼비용과 신접살림은 이성규가 8년간 교사생활을 하며 모아 둔 돈 300원으로 충당했다. 안기영이 무일푼이었기 때문이다. 안기영이 이화여전 음대교수 메리 영의 조교가 되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결혼 1년 후 첫째 영식이 태어났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25년 1월 1일에 둘째 딸 화식이 태어났다.

안기영은 둘째 딸이 태어난 진 2주도 지나기 전인 1월 12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비용은 그동안 저축한 돈과 메리 영이 보조해준 돈 그리고 빌린 돈 3백 원으로 마련됐다.

이성규는 남편의 성공만을 바라며 살림을 정리해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고 생계를 위해 다시 교편을 잡아야 했다. 산후 조리도 못한 채 두 자식과 남편의 유학비용, 빚까지 혼자 떠 맡은 것이다.

둘째 딸을 낳은 지 20일도 지나지 않아 산꼭대기에 있는 아현여학교까지 오르내리던 이성규는 급기야 류마티스에 걸렸다.

월급 44원으로 병고치고 아이 키우고 빚 갚느라 고생이 대단했지만 이성규는 자신의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안기영에게서 일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오는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는 것으로 무척 행복했다.

1928년 6월 26일 안기영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성규는 두 딸을 데리고 부산까지 마중나갔고 3년 만에 조우한 부부는 경부선 천리길이 짧게 느껴질 만큼 그간 못다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안기영은 곧바로 이화여전 강사로 부임했고 이듬해에는 첫 아들 종식이 태어나 가정에는 활기가 넘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성규에게 류머티즘이 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장남이 죽어 집안은 다시 침울해졌다.

안기영이 강사생활 1년 만에 정식 교수가 돼 형편은 나아졌으며 1930년에는 또 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지 21일 만에 죽었고 이성규에는 류마티즘이 다시 도졌다.

이성규는 만성적인 류마티즘 치료를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 남편과 남편의 제자인 김현순 사이에 불길한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둘의 관계가 심각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성공은 모두가 당신의 숨은 공로요, 나의 영광은 당신한테로 가는 영광이요”라고 고마움을 표하는 안기영의 인격을 이성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성공한 남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샘으로만 치부하고 넘겼다.
 
김현순 또한 “영원한 처녀로서 예술에 정진할 것인즉 선생님의 아내에 대한 사랑에는 침범치 않겠다”고 이성규를 안심시켰다.

이성규의 남편에 대한 믿음과 달리 안기영은 항상 밤을 새우다시피 귀가가 늦어졌고 두 차례 가출을 시도하다 가족 생각에 포기했지만 1932년 4월 11일 기어코 국경을 넘어 하얼빈으로 갔다.

이성규에게는 “나는 러시아로 갈 것이오. 피아노와 집을 팔고 살림을 줄이시오. 러시아로 간 뒤에는 주소도 알리지 않겠으니 기다리지 마시오”라는 편지가 배달됐다.

이성규는 집까지 담보잡혀 얻은 돈으로 하얼빈으로 안기영을 찾아갔다. 그러나 악화된 병세로 지인이던 변홍규 목사의 집에서 이틀 동안 쓰러져 있다가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까지도 안기영이 김현순과 새살림을 차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다가 안기영과 김현순이 동거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야 이성규는 깨끗이 모든 것을 단념하고 살아갈 대책을 찾기 시작했고 피아노를 팔아 600백 원의 생활비를 마련했다.

이성규의 마음은 안기영을 떠날 수가 없었나 보다. 이성규는 임신 4개월 째로 안기영의 아이를 갖고 있어서이기도 했겠지만 안기영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 오리리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성규는 안기영이 타국에서 고생할 것이 걱정돼 피아노를 판 돈에서 생활비를 보내주고 악단에 나설 때 쓰라고 구두와 예복까지 보내줬다.

이성규의 생활고는 날로 심해졌고 살던 집을 처분해 친정근처 조그만 집으로 옮겨야 했다. 이성규가 남편에게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동안 안기영은 하얼빈으로 김현순을 불러 눈물의 포옹을 나눴고 상하이와 도쿄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딸까지 낳았다.

안기영은 하얼빈으로 떠난지 딱 4년 만인 1936년 3월 12일 경성역에 나타났다. 장모가 사위 얼굴 한 번만 보면 편히 눈을 감고 죽겠다고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냉정히 외면했다. 안기영은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귀국 독창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안기영 귀국 독창회’는 1936년 4월 11일밤 경성공회당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일본 경찰은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공연 허가를 취소했다. 아무리 일제 때라고 하지만 순수 음악회를 못 열게 할 이유는 없었다.

안기영이 김현순과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음에도 이성규 집안에서는 안기영이 과거를 반성하고 가정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끝까지 기다렸다.

이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고 안기영이 김현순과의 애정을 찬미하는 ‘사랑의 찬가’라는 주제로 음악회를 강행하자 이성규의 가족이 음악회장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험한 사태를 미연에 막으려 했던 종교계와 학계가 일본 경찰에 탄원해 결국 안기영의 ‘사랑의 찬가’독창회는 무산되고 만다.

안기영은 이후 조선 최고의 음악가로 정열적인 활동을 펼쳤고 이화여대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김현순과 함께 월북해 평양음악무용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음악계를 주도했다. 김현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으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일제 시대 한국문단 최고의 평론가였던 백철은 “예술가는 예술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안기영을 편들었다. 예술가의 불륜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용서되고 미화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때나 지금이나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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