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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나팔수… 카멜레온 삶… 나약한 지식인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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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나팔수… 카멜레온 삶… 나약한 지식인의 표상?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02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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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유진오

경성제대 입학, 이효석·이강국과 3대수재로 손꼽혀
학창시절 마르크스 연구단체 활동 사회주의에 심취
보성전문 교수때 창랑정기-봄등 현실친화 소설 집필
김동환·박영희·이광수 등과 친일문학단체 발기인 참여

현실의 때를 탄 나약한 지식인으로 변모
13년간 고려대 총장 역임 최장수 기록
이승만 정권 초기부터 사실상 정치참여
박정희 정권땐 국가재건본부장 맡기도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 현대사를 산 지식인들을 살펴보면 화려한 변모를 거듭한 이들이 많다.

한국 현대문학 이론을 정립했다는 평을 받는 팔봉 김기진, ‘한국 현대시의 정부(政府)’로 칭송되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오른 적이 있는 미당 서정주 등이 우선 떠오른다. 고려대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현민 유진오도 카멜레온적 변모를 과시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유진오는 1906년 경성에서 대한제국 관료의 아들로 출생해 재동보통학교(재동초등학교의 전신)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대 법문학부 입학과 수석 졸업을 했다. 오늘로 치면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한 수재였던 셈이다.

유진오가 경성제대에 입학할 당시에 경성제대 안에서 그와 함께 ‘3대 수재’로 손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의 요절 작가 이효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을 초월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드라마 ‘서울 1945년’의 모티브가 된 이강국이다.
 
이강국은 ‘서울 1945년’에서 남로당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실제 이강국은 해방 전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좌익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유진오도 학창시절 한때는 마르크스 연구단체인 ‘경제연구회’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연구회 회원 가운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해산명령을 받았다.

유진오가 대한제국의 관료 집안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때문으로 볼 수도 있고 친구 이강국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이효석과 선후배 사이인 유진오는 문필 활동에도 뛰어든다. ‘김강사와 T교수’는 한국문학사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진오의 대표 작품이다.
 
그러나 유진오 문학의 출발은 1920년대에서 3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카프’계열의 좌익 문학이었다. 그러나 유진오는 카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며 소위 ‘동반자 작가’로서 억압받는 노동자, 사상문제에 집착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군상을 잘 그려낸 작가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유진오의 초기 문학 작품들 중 관심을 끄는 것들로는 ‘5월의 구직자’, ‘여직공’ 등이 있다. 5월의 구직자는 유진오의 데뷔작으로 알려져 있다. 몰락한 유생의 아들인 전문학교 졸업반 학생이 취직시험을 치르게 됐다고 부모에게 기별하자 취직된 것으로 알고 부모가 상경했지만 하필 부모의 상경 당일 취직시험에 낙방했다는 통보가 왔다는 줄거리의 단편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좌익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직공은 카프 동반 작가로 활동할 무렵 유진오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방직공장 여직공 옥순이가 일본인 공장장의 지시로 동료인 근주의 사회주의 활동을 염탐하고 이를 공장장에게 보고했지만 옥순이는 공장장에게 정조를 유린당했고 이후 근주의 활동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된 후 노조 결성의 전의를 불태운다는 줄거리다.

1930년대 초반까지 유진오의 작품 경향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카프 작가들과 비슷하게 식민지 백성의 고달픈 삶과 지식인의 고뇌 등을 다뤘다.

그러던 그가 친일로 접어든 시점은 대략 1930년대 후반부인 1936년 불과 서른의 나이로 지금의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교수가 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보성 전문 교수가 되기 전인 1934년 발표한 ‘행보’는 유진오의 사상 전환을 알리는 작품으로 거론되곤 한다. ‘행보’의 주인공 종혁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폐병이 걸리고 사상범으로 낙인 찍히게 되는데 종혁은 ‘사회주의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유진오는 종혁을 통해 자신이 사회주의를 버렸음을 선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보’이후 유진오는 보성 전문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강사와 T교수’, ‘창랑 정기’, ‘봄’ 등 일상에서 흔히 있을 법한 현실 친화적인 소설만을 쓰면서 일제에 순응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더니 결국 친일로 돌아선다.

가진 자와 지배하는 자들의 도구인 법의 본원적 속성을 법학자 유진오 역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현직 교수이면서도 친일활동은 주로 문화 단체 쪽에서 하게 된다.

1939년 김동환, 박영희, 이광수 등과 대표적인 친일문인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을 역임하는가 하면 대동아문학자대회 1, 2차 대회에 이광수와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활동 등 친일문필 활동이 눈에 띈다.

해방 후 여운형은 좌익계 친구 이강국의 ‘함께 조선인민공화국의 법을 만들자’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그가 교수로 몸담고 있던 보성전문의 창업주 김성수가 만든 한국민주당에 가입해 헌법제정에 참여했다.

동시에 1947년 이승만의 ‘독립촉성위원회’의 산하기관인 ‘행정위원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유진오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하는데 11명의 기초위원 중 유일한 헌법전문가인 그였기에 그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당시 여러 정파의 존재로 인해 내각책임제로 가닥이 잡히던 권력구조는 이승만의 지시로 갑자기 대통령제로 급선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그는 초대 법제처장에 임명됐고 한국전쟁 중 납북된 현상윤 초대 총장에 이어 195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13년 간 최장수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다. 이 시기 그는 누구보다도 한일국교정상화에 앞장서며 1950년과 51년 한일회담 수석 대표를 지냈다.

1961년에는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자신들의 기만적인 개혁의지를 국민에게 선전하기 위해 만든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아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에서도 권력 친화적인 행적을 이어갔다. 국가재건국민운동이란 결국 일제시대 국가총동원체제를 모방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편 1965년 고려대학교 총장에서 물러나 정치계에 입문한 그는 야당 당수 등을 역임하면서 반독재 운동에 가담한다.

하지만 1972년 유신선포로 박정희 독재가 강화되면서 어느 덧 그는 정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광주학살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얼굴 마담격인 국정자문위원(1980년-1987년)을 지내다 1987년 노환과 뇌졸중 합병증으로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유진오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06년부터 6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죽을 때까지 인생을 살면서 우리 민족과 민중들이 승리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어쩌면 불행한 식민지의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현실순응적인 나약한 이미지는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을 자부하는‘민족 고대’의 이미지와는 그리 썩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1987년 유진오가 죽고 그의 빈소가 고려대 안에 마련되자 당시 이문영 윤용 이상신 등 5명의 교수들이 빈소를 학교 밖으로 철거할 것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여 유진오이 영욕의 세월을 다시금 실감케 했다. 그리고 당시 발표됐던 그 교수들의 성명서는 오늘도 권력 친화적 인물에 대한 시대의 평가가 계속 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 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 해방 후 그들의 진솔한 뉘우침과 자기 고백을 들을 수 없었음을 물론이고, 분단 구조를 정착시켜 가는 과정 속에서 정권을 뒷배경 삼아 다시 ‘민족주의자’로 태어난 것은 정말 역사의 비극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온몸을 독립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또 다른 삶을 보자.

그 삶과 죽음 앞에서 어찌 세월을 들먹일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반민족·친일파 문제를 새삼스럽게 들추는 것은 단지 개인적 감정의 차원만이 아닌 민족 정기의 회복을 위한 당연지사요 ‘백가쟁명’이 아닌 진실의, 사실의 확인일 따름이다.

이것을 두고 발전적 미래를 위해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거나,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따위의 말은 부끄러운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유진오의 친일행각을 다시 한 번 조사, 확인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참담한 우리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과 ‘역사’와 ‘개인’의 참으로 어렵고도 무거운 관계이다. …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역사의 미래를 바로 세워나가는 것이며 과거의 역사를 단죄하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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