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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정치관료… 파란만장한 삶을 산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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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정치관료… 파란만장한 삶을 산 ‘풍운아’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06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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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前 문화재청장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한반도 면적 열배 넓힌 주역
 복원 낙산사 동종에 자신 이름 새겨 여론 뭇매 맡기도
“현충사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곳” 발언으로 홍역

서울대 3학년때 3선 반대시위로 무기정학
민청학련 사건 연류돼 ‘7년형’ 언도 받아
미술사 서적 열중하다 박물관에 푹 빠져
숭례문 화재로 쌓아온 멍에도 ‘잿더미’로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전 문화재청장이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우리나라의 면적을 열 배는 넓혀 놓았다는 평을 얻었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미술사학 대학원,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대학 재학 시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년간 복역한 전력이 있다. 이로 인해 이해찬 전 총리, 정동영 전 장관 등과도 교분이 오래됐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문화재 청장으로 임명됐는데 노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으로 ‘부총리급 차관급 청장’으로 불렸다.

문화재청장 임명 당시 코드인사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유홍준은 진보진영 인사들과는 물론 한나라당 의원들, 재벌가와도 사이가 돈독한 편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담 좋은 마당발’이라는 평가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을 듯하다.

그는 미술잡지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영남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을 거쳤고 현재 명지대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완당 평전’ 등이 있다.

유홍준의 이력을 이렇게만 살펴보면 순탄한 학자이자 관료의 길을 걸어 온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기까지는 숱한 고난의 세월도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국토 삼천리를 되살린 인물’이란 학자로서의 극찬과 함께 ‘완당 평전’에서는 200군 데 이상의 오류가 발견돼 책의 추천사를 거부당하는 등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학자라는 혹평도 동시에 받은 적이 있다.

유홍준이 미술사 연구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군복부 중에 있을 때다. 재미 삼아 미술사 서적을 뒤적이다 푹 빠져들어 휴가만 나오면 박물관을 찾아가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유홍준은 박물관을 통해 평생의 반려자 둘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그의 직업이 된 미술사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아내다. 그의 아내는 답사여행을 핑계로 1년에 서너 달씩 집을 비우는 유홍준을 변함없이 이해하고 성원해 줬다.
 
박물관에 많은 신세를 진 유홍준은 미술사와 문화 유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시킴으로써 신세를 톡톡히 갚은 셈이 됐다.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이 됐을 당시 그는 이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인사였다. 1997년에는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1권의 서두인 ‘월출산과 남도’가 실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국민 필도서화 됐다.

유홍준이 청장이 됐을 당시 문화재청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홍준이 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문화재청은 그 어느 관청보다 세인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 됐다.

유홍준의 민주화 운동 전력은 한 동안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지만 결국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밑천이 된 듯하다. 그는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무기정학을 당했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류돼 7년 형을 언도받았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4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 직후 건국대 미술사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가 하루만에 취소당했다. 최종 승인과정에서 복권이 안 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복권은 그 해 됐지만 그는 이 일로 몇 년을 더 시간강사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까지 그는 ‘겨레미술 공부방’을 운영하는 소장 미술 평론가이자 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버스로 전국을 누비는 프로의식이 투철한 학자였다.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이 된 이후에도 ‘마이크 정창’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남들 앞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답사여행 때도 버스 안에서 유홍준이 펼쳐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입말본’이 대 인기였다고 한다.

답사여행이 한창이던 1991년 ‘사회평론’이라는 진보적 시사문화지가 창간되면서 창간멤버로 참여했던 안병욱 교수가 “너 맨날 버스에서 떠드는 얘기, 글로 한 번 써 봐라”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연재를 시작했고 2년 뒤 이것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전 국민적인 필독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은 지난 2003년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차관급으로 격상된 국립박물관장직을 희망했었고 임명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장은 대한민국 정부나 문화계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기에 사회적 지명도나 정치력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선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학계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와중에 “유홍준은 전서와 예서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다”, “대중성은 높을지 몰라도 품격은 떨어지는 인물이다”는 인신공격성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홍준은 2004년 9월 차관급으로 격상된 임명직 문화재청장이 됐다. 그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언젠가 유홍준 카드를 꺼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고 전문가 집단과 시민단체들도 국립박물관장 거론 때와는 달리 “대중성이 높은 유홍준 교수가 관료주의에 빠진 문화재청을 혁신할 적임자”라고 일제히 환영했다.

유홍준이 청장이 되면서 문화재청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관청으로 자리매김 했다.

광화문 복원, 서울 성곽 복원, 청와대 인근 개방, 여러 문화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고시킨 공로는 유홍준이 한국 문화계에 끼친 영원한 기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유홍준은 구설수도 많았다. 지난 2005년 1월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2006년 3월에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현장에서 “관광객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흰색 안료를 칠하는 방안을 검토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보신각종 소리가 좋지 않으니 새로 교체해야 한다”고 뜬금 없이 보신각종 교체를 제의 했다가 학계와 시민단체들로부터 강도 높은 질타를 받았다.

다행히 `보신각종 교체 헤프닝’은 소리가 길게 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 주변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학계의 지적 한 방으로 유야무야 됐지만 문화재에 대한 유홍준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지적이다.

이 밖에도 문화재를 행사장으로 마구 사용해 눈총을 사기도 했다. 취임 직후인 2004년 9월에는 경복궁 경회루를 국제검사협회 총회 만찬 장소로 내줬고, 2005년에는 창경궁에서 `세계신문협회’와 `세계 철강협회’의 만찬을 잇따라 허용했다. 각계에서 비난이 잇따랐지만 유홍준은 “문화재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니 문제될 게 없다”고 반박하며 귀를 닫았다.

유홍준은 문화재를 회식 장소로 `제공’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5월 15일 효종왕릉(사적 제15호)에서 국회의원과 지역유지 등 유력인사 30여명과 어울려 숯불 바베큐 잔치를 열었다. LP 가스통까지 동원돼 파문이 커졌다.

파문이 일자 문화재청은 “활용 차원에서 내빈들한테 우리나라 아름다운 사적도 보여주고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조리 시설을 동원했다. 관행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둘러댔다. “연구를 통해 고궁, 왕릉에서의 식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지난 2005년 6월에는 평양에 가서 북한간첩 칭송영화 주제곡을 불러 파문을 일으켰고, 지난해 8월에는 2천만 원에 달하는 정부예산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량 구입한 뒤 문화재청 방문기념품으로 제공해 비난세례를 받기도 했다.

유홍준은 여러 자잘한 구설수 이외에도 2005년 6월 낙산사 전소 사건, 2006년 10월 복원된 낙산사 동종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사건 등으로 인해서도 여론의 뭇매를 맞곤 했지만 청장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오히려 정치력을 발휘해 문화재청의 권한을 확대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정부조직개편 과정에서 유홍준은 대운하사업과 연결시켜 문화재청 휘하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을 편입시킨 것이다. 대운하 사업 시 문화재 발굴 요원을 확대한다는 근거에서였다.

그러나 유홍준은 참여 정부 임기를 불과 2주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숭례문 화재로 그동안 쌓아온 명예를 한 순간에 잿더미로 날리는 불운을 겪었다.

불운이 겹쳤는지 유홍준은 숭례문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순간 혈세로 암스테르담에서 부인과 외유성 출장을 즐기고 있던 것으로 드러나 정치권과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았다. 한나라당은 유홍준을 뇌물 수수혐의로 대검찰청에 수사의뢰까지 했다.

유홍준은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관료로서의 삶도 파란만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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