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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자태 노송과 어우러진 한국최고 건축물 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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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자태 노송과 어우러진 한국최고 건축물 즐비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10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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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명물 ‘병산서원’ 탐방기

만대루 올라 낙동강-산 바라보면 “탄성 절로”
대원군때 대다수 사원 철폐불구 살아 남은곳

교통편 불편해도 선비들 수행도량 자태 뽐내
상가들 들어서며 페인트 칠된 새건물은 ‘눈살’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양반 고을로 통한다. 그래서 지금도 안동에 가면 조선시대 세도를 누리던 양반 집안의 고택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양반 고택과 함께 안동이 양반 고을이었음을 알게 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은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됐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병산동(屛山洞)에 있다.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 유씨의 사학(私學)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병산서원은 유성룡을 배출한 곳으로 우리나라의 서원 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병산서원에는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돼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폐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됐다. 사액 서원은 임금이 서적, 노비, 토지 등을 하사한 서원을 말한다.

병산서원이 한국의 서원을 대표하게 된 데에는 서원의 역사가 깔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최초의 성리학자로 알려진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 이름이 바뀌었다.

소수서원이 생긴 이후 도동서원을 비롯해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조선에는 서원문화가 확산돼 갔다.

사찰이 종교적 수도원이라면 서원은 성리학에 통달한 선비를 양성하기 위한 현세의 수도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서원은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효율적인 공부과정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었는데 향교가 국민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상류층 자제만을 위한 교육과 문화의 도장이었다. 그러나 사원은 오랜 세월 동안 철폐의 대상으로 국가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원을 중심으로 지방의 양반들이 양민을 착취하고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사원 철폐를 가장 강력이 추진했는데 대원군 집정이 시작될 무렵 600여 개소에 달했던 사원의 수는 47개소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본래 사액서원만이 세금을 면제 받는 등 혜택을 누렸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사원 문화가 변질돼 사액되지 않은 서원도 세금을 안 내고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 지방 사람들로부터 쌀을 내라거나 역을 부담하라고 명령을 하고 듣지 않으면 마음대로 데려가 곤장을 치거나 재산을 빼앗는 횡포가 자행되곤 했다.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 유랑생활을 하다 사원에서 모욕을 당한 일이 있어 집권과 동시에 사원 철폐를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63년 권력을 잡은 후 186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원철폐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1865년에는 사액되지 않은 서원들에게 납세를 명하고 1868년에는 서울 노론들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만동묘를 철폐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황제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송시열이 만들었는데 민폐가 여간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원 철폐는 계속 진행돼 1871년에는 사액서원들 중에서 47개 소만 남게 된 것이다. 유생들이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에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비록 공자가 살아온다 해도 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사원철폐에도 살아남은 47개 소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유성룡을 제사지내는 서원은 병산서원 말고도 여러 곳이 있었지만 병산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지금도 병산서원에서는 음력 3월과 9월이면 유성룡을 기리는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병산서원은 과거 선비들의 수행도량답게 도심으로부터 단절돼 있다. 교통편이 매우 불편해서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병산서원에 들어 갔을 때 그 곳을 찾은 보람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안동시내에서 버스가 하루에 단 2번 드나들며, 자가용을 이용하더라도 주변에 절벽이 보이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숙련된 운전자가 아니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버스를 이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제사가 열리는 3월이나 9월에 병산서원을 찾는다. 9월에는 안동 국제 탈춤제가 열려 병산서원이 사람으로 북적된다. 그러나 사람이 넘쳐나는 서원은 서원으로서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는 듯해 한가한 시기를 찾아 병산서원을 찾는 이들도 많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만대루다. 만대루는 기능적으로는 조망을 위해 높게 대를 쌓은 건축물이다. 마치 강 건너를 구경하기 위해 언덕에 올라선 느낌이 드는 곳이 만대루다. 만대루에 올라 낙동강과 주변의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상큼한 기분이 든다.

만대루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지만 신발을 벗고 잠시 오르더라도 말리는 사람은 없다. 병산서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주변경관과의 조화 때문이다. 주변을 장식하는 소나무, 배롱나무는 물론이고, 마루 위에서 바라보는 병산과 낙동강은 어떻게 담아도 아름답다.

병산서원의 건축은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은 진실함, 간결하고 힘찬 글씨와 같은 예지 그리고 조용하고 신중한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인격을 대하는 것과 같다고들 말한다. 병산서원을 한국건축이 도달한 최고의 경지라고 까지 말하는 이들이 있다.

병산서원의 진정한 멋은 건축 자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병산서원은 동양적 건축미학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만대루 마루 모서리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병산을 끼고 휘돌아 치는 낙동강 물줄기와 수묵화의 여백처럼 여유롭게 펼쳐진 백사장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병산서원의 설계자는 주위 자연 환경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 건물의 배치와 구조를 정했을 것이다.

서원을 둘러싼 자연 경관은 원근의 조화도 이루고 있다. 멀리 병산과 낙동강 그리고 백사장이 있다면 서원 건물 가까이에는 단아한 자태의 노송 몇 그루가 고풍스런 수묵화처럼 어우러져 있다.

병산서원의 건물은 17세기 초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들이 최근에 중창을 해 예스런 멋을 잃어버리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병산서원은 서원 본래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예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심과 단절돼 있는 병산서원 인근에 상가들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페인트 칠 된 새 건물들이 병산서원에서도 시야에 들어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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