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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리의 성공학⑨-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슬픔 자기성장의 기회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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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리의 성공학⑨-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슬픔 자기성장의 기회로 삼아라
  • 김백리 자유기고가
  • 승인 2008.03.13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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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부의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나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재혼하자 계부의 성을 따라 이름이 바뀌었고 알코올 중독자였던 계부가 죽자 어머니는 결혼을 두 번 더 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이다.

그의 자서전 <My Life>에서는 성장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르윈스키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의 심정을 묘사한 다음의 글에서 어린 시절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두 가지 생활을 병행하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비난이나 빈정거림에는 귀를 막고 내 할일만 계속했다. 언제든지 자의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이 날아올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가 더 힘들게 분명했다.”

어린 시절 빈정거림과 파괴적인 공격이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잦은 성추문과 거짓말하는 습관은 이러한 상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클린턴이 정치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정상을 되찾은 것은 상원의 탄핵 부결과 힐러리의 용서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세 명의 성직자로 하여금 한 달에 한 번씩 상담역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그는 결국 백악관에서 1년 동안 1주일에 하루씩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했다. 이전에는 아무리 가까운 친구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는데 상담을 통해 내면이 통일되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32세에 주지사가 되고 46세에 대통령이 된 사람의 내면에도 이런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1888년 일본 고베의 작은 마을에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기생의 아이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시장인 아버지의 본처 집에서 다른 가족들의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자라야 했다.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5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본처 자녀들과 한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학대를 당했는지 그는 살 의욕이 없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 틈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늘 형제들로부터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하는 조롱과 비웃음이 따라왔다. 당연히 이 소년의 성격은 소심해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첩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얼굴에서 웃음을 잃었다. 죽으려고 몇 번 생각했다.

어느 날 아주 양지 바른 곳에 혼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을 했더니 입에서 피가 가득히 나왔다.

진단 결과는 폐결핵 3기. 치료도 불가능하고, 더 슬픈 것은 아무도 치료해 주려고도 해주지 않았다. 그 아이가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 모두에게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날 울적한 기분으로 담 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 악대가 지나가면서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때 그 음성이 소년의 가슴을 울렸다. ‘나 같은 기생의 아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사랑한단 말인가’ 가까이 가서 물었다.

“기생의 아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나요?” “아, 그렇지요. 하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합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살기로 결단한다.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폐병을 얻었다. 지금은 병도 아니지만 그 당시 폐병은 지금의 암보다도 더 무서웠다. 폐병은 곧 사형선고 그 자체였다. 학교에서는 정학을 당하고 다니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다. 전염병이라는 이유에서다.

청년은 비탄했다.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목숨을 다하라는 예수의 사랑도 말 뿐이구나. 나는 누구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청년은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이 공허한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광야에 홀로된 우울은 이러한 것이다. 청년은 속으로 자살을 결심했다. 누군가가 이 청년의 심상치 않은 우울의 모습을 보고 북쪽 가나사와에 가면 목사 한 분이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후 그는 폐병을 치료하고, 그리고 평생 빈민굴에 들어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의 운명이 바꾸어졌다. 20세기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하천풍언賀川豊彦) 이야기이다.

신세가 좋든 좋지 않던 간에 대다수 사람은 자기 운명이 변하길 바란다. 항상 돈 때문에 쩔쩔매는 노동자는 ‘일한 만큼만 제대로 받아도 내신세가 좀 펼 텐데’ 하고 노총각은 ‘장가 좀 빨리 갔으면’ 한다.

또 중소회사 사장은 ‘정주영 회장 처럼 됐으면’ 하고 중간간부들은 ‘빨리 전무가 되어야 할 텐데’ 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현재의 삶에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때가 많다.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내면에서 분노하고 만족하지 않는 자아상을 갖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상처 없는 사람 없고,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픔과 고통이 있다.

때때로 우리들에게 기쁜 일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쁜 일의 원인을 심각하게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반면에 때때로 우리들에게는 고통스런 일도 찾아온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의 원인을 심각하게 분석하려고 한다. “이 고통은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운명인가? 아니면 나의 의지적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그 원인을 ‘우연’으로 볼 수도 있고 ‘자연’으로 볼 수도 있으며 또한 ‘필연’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가 고통을 ‘우연’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목적 없는 우연’을 기대하다가 낙심에 빠지게 된다.

이성주의자들은 모든 사건을,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모두 우연에 의한 운명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캘빈은 그 ‘우연’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 우리의 아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우연적이 라고 구별 지으려고 한다.”

캘빈이 지적한 것처럼 ‘설명하기 힘든 사실’을 맞이하여 무조건 이해되지 않는다고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적으로 가장 이성적 사고를 가진 수학자나 과학자들은 ‘우연’이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사건을 ‘자기 자신의 의지적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로 생각하고 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나 괴테는 불행과 슬픔을 자기 성장의 기회와 창조적 계기로 삼았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어두운 운명과 슬픔의 고통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고 상처받아 좌절하지만 지혜롭게 사신 분들은 그것을 인간심화의 계기로 삼고 자기 성장의 모체로 삼았다.

사람들은 운명이 변하길 갈망하면서도 선뜻 움직이지는 않는다. 운명을 개척하려는 계획이 웅장할수록 시련과 난관도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개척자가 다 쉽게 성공한다면 운명에 순응 하는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찾지 못할 것이다.

개척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고난과 시련이 바로 눈앞에 보여도 의연하게 운명 개척에 나선다. 오늘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 때문이라면 미래의 결과와 운명은 오늘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지난해의 농사를 잘못 지었다면 올해의 농사는 더 잘 짓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면 된다.

사랑에 실연당한 이에겐 ‘운명 같은 사랑이란 쉽게 얻는 게 아니다’라는 충고를, 사랑을 하고 있는 이에게 ‘운명 같은 사랑의 확신을’,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 운명 같은 사랑의 예고를’ 해주는 마음의 자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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