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8:45 (목)
공민왕의 최후와 대한민국 대통령들
상태바
공민왕의 최후와 대한민국 대통령들
  • 윤태현 기자
  • 승인 2018.04.15 1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혁의 초심을 잃으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태현 기자)

<고려사> 1374년 10월 27일 기사이다.

“왕이 갑작스럽게 훙서했다. 재위한 지 23년이고, 나이는 45세였다. 왕은 성품이 본래 엄중하고 행동이 예에 맞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하고 난폭하며, 질투도 많아졌고, 주색에 빠지고 미혹되는 성향도 더욱 심해졌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 군주 공민왕의 최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다. 역사의 평가대로 공민왕은 성품이 본래 엄중하고 행동이 예에 맞았다.

그는 원·명 교체기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었다. 잇따른 반란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원이 무너지고,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명이 중원의 주인이 될 것을 예측했다. 현명한 군주는 지긋지긋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 줄 알았다.

먼저 친원파인 권문세족 제거에 나섰다. 원의 기황후라는 뒷배경을 믿고 전횡을 저지르던 기철 형제를 숙청했다. 원의 내정간섭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군사 행동도 불사했다. 원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했다. 고려 사회에 만연했던 몽골의 생활풍속인 ‘몽골풍’도 일소했다.

고려가 변하기 시작했다.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권문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제거해 국가재정을 확대했다.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를 중용해 개혁 주체 세력을 양성했다. 이들은 고려를 병들게 한 불교세력의 폐단과 권문세족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공민왕의 개혁을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노회한 권력세력인 권문세족은 이들의 개혁을 그냥 두지 않았다. 권문세족의 반격이 시작됐다. 먼저 공민왕의 책사인 신돈을 제거했다. 공민왕은 급속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기하고 난폭하며, 질투도 많아졌고, 주색에 빠지고 미혹되는 성향도 더욱 심해졌다’는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

결국 공민왕은 측근인 홍륜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고려 부흥의 마지막 희망이 소멸됐다. 죽음의 순간만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의 처지가 된 고려는 결국 공민왕 사후 18년 만에 종묘사직을 마감하게 된다.
 
개혁은 혁명이다. 공민왕도 혁명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저항과 본인의 타락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987년 체제 이후 출범한 정부들은 한결같이 개혁을 약속했지만 정권 말기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구속-친인척 구속-자살-탄핵의 길을 걷게 됐다. 공민왕처럼 초심을 잃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문재인 정부도 ‘적폐청산’의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