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9:21 (목)
외세의 개입과 한반도 평화
상태바
외세의 개입과 한반도 평화
  • 윤관 기자
  • 승인 2018.05.28 0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럼프의 미북정상회담 취소와 2차남북정상회담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일제 식민지 치하 한국의 독립은 요원한 듯 보였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전통의 강호 중국을 밀어내고 아시아의 맹주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에 이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자 서구 열강은 일본 제국주의를 견제하고자 했다.
 
일제는 서구 열강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기세는 실로 놀라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이끈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일대를 휩쓸어 금방이라도 미국 서부해안에 상륙할 것처럼 보였고, 미국민들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세계 제1의 공업국 미국의 잠재력은 일본의 기세를 압도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놀라운 생산력으로 군함과 전투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됐고, 일본은 필리핀과 오키나와 등 곳곳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승기를 잡자 전후 처리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연합군 수뇌들은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국 총통이 모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며 “가능한 가장 이른 시일”이라는 문구를 넣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의 속내는 달랐다. 당시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운영했던 영국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일탈이었다. 자신의 식민지들이 독립의 광풍에 휩싸일 것을 우려했다.
 
처칠은 루스벨트를 설득했고, 결국 ‘적당한 시기’라는 불명확한 문구를 공식 선택했다. 이는 후일 남북분단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강대국의 논리는 얄타회담도 지배했다.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의 패망을 눈 앞에 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에 모여 독일의 전후 처리와 소련의 대일본 참전을 논의했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소의 합의에는 한민족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해방 후 신탁통치 의제는 좌우익 갈등을 촉발시킨 분열의 씨앗이 됐다.
 
전쟁이 끝났다. 미·영·중 수뇌들은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만났고, 소련의 스탈린도 뒤늦게 참여했다. 이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며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를 토의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마침내 일본이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백기를 들었고, 우리는 35년 간의 일제 통치를 마감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가장 아쉬운 점은 강대국의 논리에 우리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놓고 전격 취소를 결정해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김정은 정권이 미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몽니를 부리며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을 내놓자 ‘취소’라는 초강력 조치로 맞대응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북 정상회담의 상수는 미국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북한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요청해 양 정상은 26일 북측 판문각에서 만나 미북 정상회담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의 생사를 건 중요한 시대 요청이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국제문제이기도 하다.
 
70여년 전 우리의 독립을 연합국 수뇌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돼 한반도 분단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지만, 이제는 남북과 한반도 주변 4강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