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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분열이 낳은 치욕의 역사,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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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분열이 낳은 치욕의 역사, 을미사변
  • 윤관 기자
  • 승인 2018.08.05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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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분열로 갈갈이 찢어진 정쟁이 낳은 비극을 잊지 말아야”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을미사변은 조선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 시해된 치욕의 역사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단 맛에 빠진 일본의 눈에는 일국의 왕비는 살해해도 무방한 존재였다.
 
<고종실록> 고종 32년 8월 20일 기사는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다”라고 기록했다.
 
실록은 “훈련대 병졸과 순검이 서로 충돌해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19일 군부 대신 안경수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고 전한다.
 
이어 “이날 날이 샐 무렵에 前 협판(協辦) 이주회가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을 호위해 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며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명성황후의 평생 정적(政敵)인 흥선 대원군도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들어왔으니 그 책임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이미 임오군란 당시에도 며느리인 명성황후의 생사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장례를 치루고자 했던 인물이다.
 
당시 왕비를 지켜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상당했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宮內大臣) 이경직은 전각 뜰에서 해를 당했다. 이들 이외에도 상당수의 궁녀들과 내시들도 이날 참변을 당했다.
 
실록은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돼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비겁한 군주 고종은 평생의 배우자이자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변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에 굴복해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는 조령을 내린다. 크게는 일국의 국왕으로서, 작게는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는 참으로 비겁하고 옹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을미사변은 일본의 극악무도한 제국주의 침략의 한 단면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일제와 내통한 친일파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을미사변은 국론분열로 갈갈이 찢어진 정쟁이 낳은 치욕이다. 후세 정치인들은 치욕의 역사 을미사변을 되새겨 보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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