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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농민봉기와 100만 실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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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농민봉기와 100만 실업시대
  • 윤태현 기자
  • 승인 2018.10.14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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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고통이 더 심해지면 지지율은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태현 기자)

19세기 조선 백성의 삶은 ‘고난의 행군’ 시기다. 세도 정치가 판을 치면서 탐관오리의 수탈과 삼정의 문란은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늘도 무능한 세도 정치에 노했는지 잦은 자연재해와 전염병까지 조선에 퍼부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산간벽지로 도망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로 흘러 들어가 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갔다. 삶의 고통이 깊어질수록 사회 의식도 높아졌다. 조선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투서와 벽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백성의 저항은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일부 과격한 백성들은 도적이 돼 지방 관청과 부정축재한 양반의 집을 약탈했다, 백성들의 불만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대규모 농민 봉기로 확대됐다.
 
바로 홍경래의 난과 임술농민봉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봉기의 지도층은 몰락한 양반이나 향반, 서얼 등 권력에서 배제된 계층들이 주도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민에 대한 지역 차별과 세도 정치에 불만을 품은 몰락 양반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 봉기다.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탐관오리의 수탈과 지역 차별에 신음하던 평안도민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이들은 봉기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아직 하늘은 이씨 왕조를 버리지 않았다.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 전세가 역전돼 결국 5개월 만에 진압됐다.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다가 50여년이 지나 진주민란을 계기로 임술농민봉기가 터졌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세도 정치권은 조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고, 백성을 위한 정책은 뒷 전에 두고 수탈에만 전념했다.
 
1862년 진주에서 몰락 양반 유계춘이 주도한 진주 민란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역시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수탈에 견디지 못한 전국의 백성들이 호응한 것이다. 조정도 이번에는 무력으로는 분노의 화염에 휩싸인 백성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정은 봉기의 최대 원인인 삼정의 개혁을 제시했다. 조정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며 개혁에 나섰으나 개헉의 방향을 구조적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으로 잡은 것이 실책이었다. 결국 조정과 백성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 12일 통계청이 발표한 실업자 수가 100만명을 또 넘어섰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 정책 방향을 고수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다르다. 실업은 국민의 삶을 해치는 대표적인 고질병이다.
 
의사마다 치료법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환자가 배가 아프다는데 머리를 치료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정부는 시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제대로 청취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이 치료법이 아니라면 서둘러 잘못을 시인하고 정책 수정에 나서야 할 것이다. 환자의 고통이 더 심해지면 지지율은 분노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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