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3:37 (화)
신선의 풍류가 깃든 무릉도원 연상 ‘한국 최고장원’
상태바
신선의 풍류가 깃든 무릉도원 연상 ‘한국 최고장원’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24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릉 ‘선교장’ 탐방기

9대에 걸쳐 240여년 유지돼온 고택
국내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전통가옥

민간주택으론 최초로 국가지정 문화재 돼
전체방수 99칸 이었지만 화재로 84칸 현존
10동의 건물 규모 엄청나 ‘왕궁’ 연상케

강릉은 강원도의 작은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한국인이면 모두 아는 명소가 많다. 여름이면 한 번 쯤 찾고 싶은 경포대 해수욕장이 있고 신사임당의 친정인 오죽헌도 빼 놓을 수 없다.

경포대와 오죽헌에 비해 좀 덜 알려졌지만 선교장을 보지 않고 강릉에서 돌아온다면 아쉬움이 클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교장의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만다. 선교장은 전주 이씨가 누대에 걸쳐 살고 있는 집이다.

선교장은 경포대에서 아주 가깝다. 경포대에서 강릉 시내로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면 버스 한 두 정거장 거리다. 시내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편으로 조선시대의 전통가옥 선교장이 있다.

과거에는 경포호가 지금보다 두 배도 더 넓었다고 하는데 그 시절에는 선교장 앞까지도 호수여서 배를 타고 들어 다녔고, 그래서 동리 이름이 ‘배다리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이름도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민간 가옥 건축은 지방에 따라, 신분에 따라 그 모습과 특징이 모두 달랐다. 선교장은 강원도 해안에 위치해 지방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서울 양반댁의 건축 양식도 혼합돼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건축학자 정인국은 선교장에 대해 “한국 상류주택의 두 가지 유형인 집약된 건물배치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 가운데 선교장은 후자에 속한다.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차 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 구조로 선교장을 규정한 건축학자적 관점이다.

한국예술 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가족용 주택 영역을 대외적 영역이 감싸고 있는 중첩적인 구성이다. 선교장을 통해서 한국건축의 집합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건물군의 형태적인 집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장의 조영사가 축적해 온 시간적 집합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선교장을 해석했다.

김 교수의 해석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선교장이 9대에 걸쳐 240년 동안 유지돼 왔다는 사실, 다시 말해 실제로 살림집으로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면 납득이 될 듯하다.

전통 양반 주택이어서 살림살이 집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정사를 논하는 공간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살림살이 집은 안쪽에 위치하고 대외적 공간이 바깥에서 둘러쌓고 있는 형상이다.

선교장의 중첩적 구성은 단독 건물 안에서도 발견된다. 건물 한 채에서도 살림집으로서의 기능과 대외적 기능이 혼재하고 있다.

‘활래정’이 좋은 예다. 활래정은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에 손님에게 차를 준비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손님은 마루를 거쳐 방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차를 준비하는 공간은 손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손님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고 조선시대 차 풍속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손님을 차상 앞에 모시고 앉아서 직접 차를 끓이지 않고 부속 차실에서 준비된 차를 다동(茶童)이나 시동(侍童)이 차상에 들고 내오게 했다.

선교장이 문화재로서 주목을 끌게 된 이유는 민간 주택으로는 최초로 문화재 지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1965년 국가지정 민속자료 제5호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이나 공공건물이 아니면 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예가 전무했는데 선교장이 최초의 예외가 됐다. 그만큼 선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전국에 명성이 알려져 각 계의 전문가들이 선교장의 가치를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교장은 우선 그 규모 면에서 일반 민간 주택의 개념을 넘어선다. 대지가 3만 평에 이른다. 현재 10동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압권은 단연 행랑채다. 60미터에 걸쳐 펼쳐지는 행랑채는 궁궐에나 가야 볼 수 있음직한 초대형 건물이다. 11개의 하인들 방과 6개의 광, 부엌 2개, 대문 2개가 연속된다.
 
소담한 굴뚝만 5개고. 솟을대문의 현판에는 선교유거(船橋幽居)라고 적혀있다.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양반 집에만 솟을대문을 만들 수 있는데 종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초헌)가 들어가야 하기에 대문을 높이 올린 것이다. 

선교장의 전체 칸수는 99칸이었지만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84칸이 현존한다. 건물의 기둥과 기둥사이가 한 칸이다. 건물의 칸 수는 앞면의 칸 수와 옆면의 칸 수를 곱해서 따진다.

조선시대의 건물 칸수는 엄격히 규제됐다. 대군은 60칸, 군이나 공주는 50칸, 옹주나 종 2품 이상은 40칸이다. 선교장의 설립자는 이내번인데 그가 종2품이었으니까 40칸을 넘을 수 없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규제가 완화되면서 99칸 까지는 눈감아 줬다고 한다.

선교장의 전체적인 규모가 왕궁을 연상케 하는 것과는 달리 개개 건물은 독립성을 지니며 독특한 개성을 풍긴다. 바깥 마당에 조성된 연못과 그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내리고 서있는 활래정은 그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주자의 시 위유원활수래(爲有源活水來)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활래정은 손님 접대를 위한 다실까지 갖춘 마루와 온돌방이 물위에 떠 있어서 시원한 정자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이 연못을 지나 본채 쪽으로 들어가면 바깥 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고 행랑채 중간에 솟을 대문이 있는데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 서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 걸인 열화당(悅話堂)이라는 현판이 또한 눈길을 끈다.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신조로 삼았던 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이 사랑채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세상 일은 잊어버리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하랴, 친척의 정겨운 이야기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을 벗하여 온갖 시름을 잊어버리자” 라는 시구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장소로 썼다고 한다.

돌계단 위에 높직이 올라선 이 열화당은 보기에도 시원하고 처마가 높아서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전통양식을 약간 벗어난 것 같은데 아마도 처음에 지은 것을 나중에 고친 것 같다. 조선의 전통 양식에서 다소 벗어나 개화기의 서양식 건축 기법이 도입된 것으로도 보인다.

현재 이 집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는데 안방, 부엌,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됐고 상당히 넓은 부엌이 대가족을 거느렸던 살림 규모를 알게 한다. 선교장이 더욱 멋져 보이는 이유는 처음 지은 때로부터 현재까지 집 주인이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