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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파 사대부의 몰락…고용세습 의혹과 코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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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파 사대부의 몰락…고용세습 의혹과 코드 인사
  • 윤관 기자
  • 승인 2018.11.04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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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의 몰락, 자기 식구 챙기기와 정치 권력 세습화에서 비롯”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조선의 건국세력은 혁명파 사대부다. 이들은 고려말 신흥 무인의 리더인 이성계를 역성혁명을 이끌 지도자로 선택했다. 조선의 건국은 정도전이 이끄는 혁명파 사대부와 신흥 무인의 리더 이성계 간 통합의 결과다.
 
정도전은 탁월한 무인 이성계를 이용해 새 나라 조선을 설계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방원이라는 호랑이를 간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조선은 ‘이씨의 왕국’인데, 감히 정도전이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가만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최대 정적 정도전을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차지했다.
 
1~2차 왕자의 난은 혁명파 사대부의 1차 분열이다. 태종 이방원은 혁명파 사대부의 새로운 리더가 됐다. 그는 국왕 중심의 6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을 확립하자 정도전이 꿈꾸던 재상 중심의 조선은 사라졌고, 왕권 중심의 이씨 조선이 완성됐다.
 
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부왕 태종과 달리 통합의 정치를 시도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국정의 기조로 삼아 국정 파트너를 위해 권력을 일부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신생국 조선의 통치체제 완성을 위해선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다. 집현전을 신설해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성상문 등 뛰어난 인재들은 ‘세종 캠프’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들 신흥 혁명파 사대부들은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한민족사적 업적을 남겼고, 또 장영실과 같이 신분제를 뛰어넘는 인재 등용은 측우기와 자격루와 같은 과학기술 강국 조선의 입지를 굳혔다.
 
또 김종서와 최윤덕, 이종무와 같은 명장들은 북으로는 4군 6진 개척과 남으로는 대마도 정벌을 통해 여진과 왜의 침략 의지를 궤멸시키고 동북아의 군사 강국 조선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혁명파 사대부의 2차 분열은 예고된 비극이었다. 세종 사후 문종이 단명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권력 투쟁이 시작됐다. 단종을 지키려는 김종서 세력도 권력 투쟁의 한 축을 차지했다.
 
역사의 선택은 조선 최고의 책사 한명회를 가진 수양대군이다. 계유정란으로 왕에 즉위한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은 사육신과 같은 일부 혁명파 사대부를 제거했다. 이른바 ‘혁명파 사대부의 제2차 분열’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 혁명파 사대부는 1~2차 분열로 훈구파로 변질됐다. 이들은 세조와 성종을 거치면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으나, 정치적 실권을 세습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즉 자기 식구 챙기기에 나선 것이다.
 
혁명파 사대부 출신 훈구파는 잇따른 분열로 권력을 장악하자 자신들이 척결하고자 했던 고려말의 적폐세력인 권문세족으로 변질한 것이다. 결국, 고려말 혁명파 사대부와 맞섰던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인 사림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일부 공기업의 고용세습 의혹이 정국을 강타했고, 친여권 인사들의 코드 인사 문제도 끊이지 않고 있다. 혁명파 사대부의 몰락이 자기 식구 챙기기와 정치 권력 세습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교훈이 기억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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