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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개화파의 독선이 낳은 비극,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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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개화파의 독선이 낳은 비극, 갑신정변
  • 윤태현 기자
  • 승인 2019.01.27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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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원하다면서 정작 백성이 원하는 토지 개혁을 외면했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태현 기자)

조선의 개화파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이들은 개화 추진 방식과 외교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온건 개화파는 청과의 전통적 사대관계를 중시하며, 청의 ‘양무운동’을 롤모델로 삼아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전통적 유교 질서를 기본으로 삼고,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했다.
 
반면 급진 개화파의 롤모델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청년 양반 관료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 수용은 당연하고, 근대적 사상과 제도의 적극적인 수용을 추구했다.
 
특히 청과의 사대 관계 청산은 이들의 숙원 정책이었다.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조선의 자주 독립이 보장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온건 개화파가 장악한 민씨 정권은 급진 개화파의 방식을 싫어했다. 양 측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김옥군의 일본 차관 도입 실패 사건이 터졌다. 김옥균은 개화 정책 추진 자금의 확보를 위해 일본 차관 도입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차관 정책 변화로 실패했다.
 
온건 개화파는 즉각 반격에 나섰고, 급진 개화파는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이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쿠데타’였다. 마침 온건 개화파의 후원 세력인 청군이 청·프 전쟁으로 일부 철수했고, 일본은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마침내 급진 개화파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D-데이로 삼아 민씨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른바 ‘갑신정변’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들은 고종을 압박해 14개조 혁신 정강을 발표했다. 혁신 내용은 좋았다. 먼저 오랜 숙원인 청과의 사대 관계 청산과 내각 제도 수립 등이 골자가 됐다. 또한 문벌제도 폐지를 통한 인민평등권 보장 등 신분제 개혁도 추진했다. 참으로 신났다.
 
하지만 민씨 정권의 반격은 신속했다. 베트남에 있어야 할 청군이 너무나 빠르게 한반도로 복귀했고, 당초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이 청군의 기세에 눌려 배신했다. 불과 거사 3일 만에 이뤄진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들은 역적이 됐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 등으로 도피했고, 홍영식 등은 처형당했다. 결국 이들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급진 개화파는 조선 지배층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들은 근대화를 원하면서 정작 백성이 원하는 토지 개혁을 외면했다. 또한 온건 개화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다수의 인사들을 살해했고, 자신들의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신정변은 자신들만이 조선의 개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독선이 낳은 비극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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