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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사건과 극우주의 망령에 물든 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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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사건과 극우주의 망령에 물든 한국당
  • 윤관 기자
  • 승인 2019.02.2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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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도 극우의 길을 선택한다면 멸망을 자초한 청과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19세기 중국은 ‘잠자는 사자’가 아닌 ‘병든 돼지’였다.
 
제1~2차 아편전쟁 패배 이후에도 청 왕조는 철 지난 중화사상에 젖어 제국주의 침략을 방관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됐다.
 
청은 양무운동을 펼치며 나름대로 근대화의 시늉을 냈다. 청은 일본처럼 서구 제국주의의 본질을 깨달아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했어야 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반발로 실패했다.
 
청의 굴욕은 청일전쟁 패배로 절정에 달했다. 청은 조선의 종주권을 위해 일본과 일전을 치루며 랴오둥 반도마저 빼앗겼다. 다행히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되찾았지만 3천만 냥이라는 거금을 일본에 지불했다.
 
청의 지식인들도 청일전쟁 패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 변법론자들은 변법자강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부정부패의 근원인 과거제 개혁과 신교육 및 상공업 진흥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하지만 서태후 등 보수파는 기득권 상실을 우려해 반격에 나섰고, 변법자강 운동은 실패했다. 청의 개혁은 번번이 보수파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열강의 침략을 자초했다.
 
중국 민중도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고, 크리스트교 확산에 대해 불만을 품고 봉기에 나섰다. 이른바 ‘의화단 사건’이 터졌다. 이들은 부청멸양의 구호를 내세우며, 크리스트교 교회당과 철도 등을 공격했다.
 
청 왕조도 이를 은근히 선동했다. 의화단은 1900년 북경까지 진격해 관군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공격했다.
 
의화단의 봉기는 열강에게는 대륙 침략의 명분을 제공했다.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은 북경에 침입해 의화단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후일 이 사건은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로 열강의 침략을 미화한다.
 
청은 의화단 사건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연합국과 ‘신축조약’을 맺어 거액의 배상금과 베이징에 외국 군대 주둔을 허용했다. 러시아는 덕분에 만주에 군대를 주둔하게 돼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결국 청은 11년 후 패망했다.
 
자유한국당 일부 세력이 5·18 발언 파문을 일으켰다. 이들은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며 극우세력의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발언은 극우의 지지를 이끌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손혜원-서영교 의혹, 김경수 지사 구속,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으로 위기에 빠진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당 극우세력 덕분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보수 일각에서는 현재의 한국당으로는 정권재탈환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청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근대화를 보수파의 반대로 스스로 포기했다. 또 의화단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反외세운동으로 멸망을 자초했다. 한국당도 극우의 길을 선택한다면 멸망을 자초한 청과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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