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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북아 중재자 고려와 한반도 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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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북아 중재자 고려와 한반도 비핵화
  • 윤관 기자
  • 승인 2019.03.31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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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는 국제정세에 밝은 서희의 외교전과 강감찬 장군의 국방력이 존재했기 때문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자이자 중재자였다. 고려 태조는 옛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북진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태조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를 적대시했다. 거란이 친선의 의미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이 대표적이다.
 
중원을 도모하던 요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고려가 눈엣가시였다. 송을 치고자해도 고려가 후방을 위협하면 협공의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에 요는 고려를 먼저 치기로 하고 세 차례의 침략을 감행했다.
 
1차 침략때는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외교적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고려의 지연 전술에 분노한 요는 고려 내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재침에 나섰다. 군사적 열세였던 고려는 개경을 버리고 나주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양규의 항전으로 맞서 개경 함락의 치욕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다.
 
요는 최후의 결전으로 3차 침략을 단행했다. 거란은 침략 전 고려왕의 거란 입부와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 반환을 강요했다. 고려도 결사 항전을 각오했다.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강감찬 장군이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맞섰다.
 
고려와 거란의 최후의 일전은 귀주에서 펼쳐졌고, 거란군은 거의 몰살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압록강을 넘은 병사의 수가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거란의 참패가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와 거란의 25여년에 걸친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귀결됐다. 거란은 막대한 군사적 손실로 고려뿐만 아니라 송나라 침략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송은 고려의 승전으로 거란의 침략 위협이 제거되자 고려를 우대했다.
 
고려의 승리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보증했다. 고려가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꾸준히 국방을 강화했고, 주적인 거란족의 요에 대한 확고한 적대정책을 펼쳐 민족적 자존심도 세웠다.
 
특히 국제정세에 밝은 서희의 담판은 강동6주 획득이라는 외교전의 백미로 손꼽히며,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동북아의 평화를 주도한 진정한 균형자와 중재자의 모습이었다.
 
미국과 북한과의 하노이 담판 결렬 이후, 한반도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북한은 냉담하다. 전쟁은 피해야겠지만, 전쟁 대비는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된다.
 
고려가 동북아의 평화를 이끈 이유는 국제정세에 밝은 서희의 외교전과 강감찬 장군의 국방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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