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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1인 가구] 조선의 1인가구를 울린 의창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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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1인 가구] 조선의 1인가구를 울린 의창의 폐해
  • 윤관 기자
  • 승인 2019.04.24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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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탄식 “백성의 가난하고 부유한 것도 조사하지도 아니하고서~”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빈민 구제를 위한 구휼정책을 펼쳤다. 역사에 따르면 고구려 고국천왕은 재상 을파소의 건의를 받아 ‘진대법’을 시행했다. 이는 식량이 가장 부족한 시기인 봄에 국가가 곡식을 대여해주고, 추수가 끝난 가을에 되돌려 받는 제도다. 진대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복지정책으로 알려졌다.

고려도 의창을 통해 빈민구제에 나섰고, 조선도 이를 계승했다. 특히 여말선초의 혼란기인 세종 재위시절에는 홀로 된 백성들을 위한 배려를 많이 베풀었다. 하지만 문제점도 많았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세종 28년 2월 29일 기사는 “가난한 이들을 진휼하기 위한 의창의 취지가 살려지도록 할 것을 의정부에서 아뢰다”라고 기록돼 있다.
 
의정부는 “《육전(六典)》에 이르기를,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디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賑恤)하기 위한 것인데, 경외(京外)의 환상(還上) 미두(未豆)를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가난한 평민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고, 대소(大小) 양반(兩班) 중에서 혹은 상장(喪葬)의 일을 만났거나, 혹은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만난 사람과 한 마을에서 모두 아는 가난한 사람을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로 분간해 나누어 준다’고 했다”며 “의창의 설치가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기 위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의정부는 “근년 이후로 각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상항(上項)의 성법(成法)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백성의 가난하고 부유한 것도 조사하지도 아니하고서 한결같이 권농(勸農)·정장(正長)의 도목장(都目狀)의 숫자에 따라 인구를 계산해 지급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런 까닭으로, 비록 부자일지라도 또한 환상은 장리(長利)의 이식(利息)을 내는 비교가 아니라 생각해 자기 집 곡식은 묻기도 하고 옮기기도 해 척간(擲簡)할 때에 양식이 떨어진 사람처럼 해 속여서 환상을 받게 되고, 심한 사람은 장사할 밑천을 만들기고 하고, 또 술과 음식을 만들어 향도(鄕徒)와 음사(淫祀)에 제공할 비용으로도 만든다”고 개탄했다

의창을 운영하는 관리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창을 임의대로 운영해서 본래의 취지와 목적에 反하는 역설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특히 환과고독과 같은 조선의 1인가구들은 의창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유한 이들의 재산축적에 국가 예산이 악용되는 현상이 드러났다. 의정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세종에게 간한 것이다.

결국 병인년에 각도에 나누어 준 미곡이 1백 15만 3백여 석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의창의 혜택을 원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지니 조정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복지 담당자들은 조선의 정책입안자들이 고민했던 의창의 문제점을 세밀히 살펴 복지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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