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9:51 (수)
단종의 정몽주 재평가와 적폐청산
상태바
단종의 정몽주 재평가와 적폐청산
  • 윤태현 기자
  • 승인 2019.04.28 14: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는 잊고자 한다고 해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산업화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태현 기자)

역사는 잊고자 한다고 해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산업화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다. 사진제공=뉴시스
단종은 과거와의 화해를 도모했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12월 13일 기사는 “고려의 공신·충신·명장 등을 왕씨의 제사와 함께 제사하도록 하다”라고 전한다.
 
특히 의정부가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해 조선 왕조 개창에 반대한 정몽주에 대해서 아뢰기를, “문충공 정몽주는 공양왕을 도와서 반정하고 중흥 공신이 돼 드디어 시중(侍中)에 제배(除拜)됐으나, 끝내는 절의(節義) 때문에 죽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처음에 명나라가 비로소 일어났을 때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힘써 청해 가장 먼저 귀부했으나, 공민왕이 죽고 난 후 이인임 등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고자 함에 정몽주가 또 그 불가함을 극진히 진계했다”고 칭찬했다.
 
또 정몽주의 대일 외교에 대해서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를 금할 것을 청하고, 정몽주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진히 펼치니, 이에 그 주장(柱將)이 공경하고 복종해 포로된 사람 수백 명을 돌려주고, 〈왜구가〉 세 섬을 침입해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고황제(명 태조 주원장)가 세공(歲貢)을 증가시켜 말 5천 필(匹), 금(金) 5백 근(斤), 은(銀) 5만 냥(兩), 포(布) 5만 필로 정하자, 정몽주는 명나라 서울로 가서 증가된 세공을 제감(除減)할 것을 주청했고, 또 호복을 혁파하고 화제(華制)를 계승할 것을 건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은 각 왕대(王代)에 배향된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라며 “청컨대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 때 함께 제사하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이에 단종은 그대로 따랐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이 역성혁명을 꾀하지 이를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이방원에 의해 참살된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다. 그는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개혁을 원하던 신진사대부였지만 새 왕조 창업에는 반대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는 한, 조선 왕조 개창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고, 反이성계 세력의 중심인 정몽주를 참살했다. 정몽주가 제거되자 온건파 사대부들은 중앙 정계를 떠나 은거에 들어갔다. 후일 두문동의 학살로 알려진 72명의 의로운 선비들이 희생될 정도로 조선왕조의 개막은 피로 얼룩졌다.
 
시간이 흘러 세종의 치세를 거친 조선의 사대부들은 역사 재평가에 나섰다. 태종 시대에서는 금기어였던 정몽주를 다시 떠올렸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의기 있는 사대부들의 기억에는 충신 정몽주가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정치의 승자는 자신들의 유리한 일만 기억하고 싶어한다. 조선의 집권층도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역사 속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단종은 잊혀진 역사의 주인공인 정몽주를 이렇게 살렸다. 역사는 잊고자 한다고 해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산업화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