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의식의 화신 선조와 이순신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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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의식의 화신 선조와 이순신 장례
  • 윤관 기자
  • 승인 2019.06.1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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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졸한 군주를 잘못 만난 대가는 불쌍한 백성의 몫이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사진제공=청와대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항상 경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중 일본의 계략에 넘어가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키고, 역모의 죄를 물어 잔인한 고문을 지시했던 못난 군주가 선조다.

무능한 선조의 옹졸함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장례문제를 놓고도 여실히 드러난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1일 기사는 이순신 장군의 장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조는 “등 총병(鄧摠兵)의 치제관(致祭官)은 이미 차출했으니 곧 내려보낼 것”이라며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李舜臣)의 상구(喪柩)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해 아산(牙山)의 장지(葬地)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 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예조가 언급한 등 총병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등 명나라 수군 장수 등자룡을 말한다.

예조는 “치제하는 차례에 있어 서로 구애되지 않을 듯하므로 본조의 낭청을 먼저 보냈다. 이축(李軸)을 오늘 내일 사이에 재촉해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이순신 장군의 장례를 먼저 치루자고 간했다.

하지만 선조는 “중국 장수를 먼저 제사하고 다음에 우리 나라 장수를 제사하는 것이 예의상 옳을 것”이라고 단칼에 거부했다.

선조는 “상구가 한 곳에 있다 해 선후의 절차를 따지고, 각기 다른 곳에 있다 해 중국인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를 것이라고 여겨 우리나라 장수를 먼저 제사하려고 하는 것은 도리상 온당치 못한 듯싶다”머 “등 총병에 대한 치제관을 속히 먼저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선조의 명에 대한 철저한 사대의식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반감이 한꺼번에 드러난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7년 전쟁 내내 국가의 지원 없이 본인의 능력으로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도 이순신 장군의 몫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 소식이 불편했다.

자신은 수도 한양을 버렸고, 조선도 버리고 명으로 귀부하려고 했던 비겁한 군주였지만, 이순신은 풍전등화에 빠진 조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열등의식이 존재했다. 선조의 옹졸함은 이순신 장군의 장례도 명나라 장수의 장례 후에 치루라는 지시에서 절정에 달한다.

결국 영웅을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 왕조는 40년도 지나지 않아 여진족의 침략을 맞이한다. 옹졸한 군주를 잘못 만난 대가는 불쌍한 백성의 몫이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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