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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자락 품에안겨 승가의 얼 잇는 천년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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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자락 품에안겨 승가의 얼 잇는 천년고찰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4.01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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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월정사’ 탐방

하늘높이 곧게 뻗은 전나무길 장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보관 장소
경내 들어서면 팔각구층석탑 눈길

안정·화려함 조화이룬 건축미 물씬
몇번의 화재로 손상불구 원형 보존

강원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문화재가 드문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대산 월정사는 강원도에 위치한 천년 고찰로 유독 돋보인다. 월정사에는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이 있다. 팔각구층석탑이 오대산 월정사에 없었다면 강원도는 문화재 빈곤증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월정사 찾아가는 길에는 명소가 있다. 바로 전나무길이다. 전나무는 하늘을 가릴 만큼 곧고 높이 치솟아 있다. 전나무길을 걷고 있으면 월정사를 찾아가는 기대를 더하고 그냥 쭉 뻗은 길인데도 단조로워 보이지 않아 지루할 시간이 없다. 나무가 길을 덮고 있다 보니 별천지에 와 있는 것 같고 공기가 참 맑다. 월정사도 속세와는 완전히 떨어진 새로운 세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월정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의 전나무길이 아름다운 것과는 많이 다르다. 여러 차례 화마를 입어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했다.

월정사는 강원도 지역 대한불교 조계종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가모니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자장이 창건할 당시에는 풀과 나무를 엮어 만든 임시암자에 불과했지만, 그뒤 신효(信孝)·신의(信義)·유연(有緣) 등의 고승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면서 점차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월정사에 보관돼 있는 사적기(사찰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문서)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버렸지만 이일(而一)이 다시 지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됐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데,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해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됐다.

한국 전쟁 중 월정사뿐 아니라 전국의 천년 고찰들이 적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불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월정사가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불탈 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돼 이 절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 뒤 1964년에 탄허(呑虛) 스님이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만화(萬和) 스님이 계속 중건해,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용금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월정사의 현재 건물들은 1300년 역사와는 맞지 않게 지어진지 50년 내외밖에 되지 않는 신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월정사는 무형의 역사 가치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데 지난 2006년 월정사는 국가적인 관심사가 됐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의 보관장소가 바로 월정사였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일본 도쿄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7책이 93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오면서 보관 장소를 놓고 서울대 규장각, 국립고궁박물관과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 보관장소인 월정사가 논쟁에 휩싸였다.

강원도와 월정사는 조선왕조 실록 반환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월정사로 원위치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관 기술과 안전 대책 미흡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오대산본 47책은 현재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오대산 사고에 보관됐던 조선왕실 의궤가 일본 궁내청 서고에 있다고 한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가 시리즈 형태로 정리돼 있어 왕실 행사의 변천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조선왕실의궤에는 명성황후국장도감 의궤가 포함돼 있는데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2년 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되기까지 모든 과정의 기록이라고 한다.

월정사에는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가 붙여놓은 현수막이 걸려 있어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재가 반환될 날을 기대하게 한다. 일본도 조선왕실의궤를 절차를 거쳐 반환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상태다.
비록 월정사에 보관되던 국가적인 기록 문화유산을 일본에게 빼앗겼지만 월정사가 주축이 돼 오랜 노력 끝에 돌려받는 데 성공하면서 월정사의 위상이 제고되는 듯하다.

월정사는 지난 1999년 10월 사찰 내의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성보박물관을 개관했다. 성보박물관은 개관 이래 2000년 7월 제1종 불교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한 후 월정사와 강원 남부의 60여개의 사찰의 성보(불교문화재를 이르는 말)들을 보존, 전시, 연구에 힘쓰고 있다.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국보 제292호인 상원사중창권선문과 보물 제745호인 월인석보, 1970년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의 해체, 보수 시에 발견된 총 11점의 사리구와 1984년도에 발견된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의 복장유물 세조어의 등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월정사를 빛내는 것은 단연 팔각구층석탑이다. 월정사 경내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모습 역시 팔각구층석탑이다. 절 마당 한 가운데 위치해 있어 당당해 보이는 데다 안정감과 화려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시대 석탑의 양식과는 분명히 차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사각형 모양의 돌을 3층으로 쌓는 석탑이 유행했지만 고려 시대에 오면서 여러 각을 이루고 있는 돌을 여러 개의 층으로 쌓는 다각 다층탑이 유행했는데 월정사 팔각구창석탑은 다각다층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만큼 화려하고도 세련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각 층마다 풍경이 달려 있는 것도 묘미다. 풍경은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는 장식품인데 주로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높이가 15.2m로 5층 건물만하지만 몸통이 날씬해 둔해 보이지는 않는다. 날렵해 보이는 석탑의 각층에 살살 움직이는 풍경이 달려 있어 팔각구층석탑은 날씨가 좋을 때면 하늘로 들어 올려질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현재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보존상태는 기본적으로 외부에 노출돼 있어 돌 표면에 발생하는 돌이끼나 미생물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외부에 노출된 석탑에는 모두 이러한 것이 발생한다.
 
월정사에서는 매년 탑의 표면을 세척하고 있다. 또한 탑의 크기가 크다보니 진동이나 기타 충격에 의해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는 안정화된 상태라고 한다.

그 동안 몇 번의 화재로 각 부재에 손상을 입었으나 그 형태는 원형을 갖추고 있다. 또 6.25 전쟁 때 사찰 건물이 불에 타는 바람에 이 석탑도 피해를 입어 1970년 10월 전면 해체보수 됐는데, 당시 제 5층 옥개석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아마도 고려시대 초기 석탑으로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처럼 보존 상태가 뛰어난 석탑은 없는 것 같다. 1,000년을 한결같이 같은 장소에 서 있는 석탑을 보는 것만으로 경외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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