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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치 거친 최고권력자 ‘형님’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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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치 거친 최고권력자 ‘형님’다운 여정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4.04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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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국회부의장 이상득

MB는 고교 장학생… 형은 육사로 진학
육사-서울대-코오롱 과정에 의문도 제기
코오롱 입사 17년만에 사장까지 ‘입지전’
88년 국회입성 후 요직 거치며 인맥 넓혀

공천 파문엔 “내 경륜 동생에 도움될 것”
‘형님권력’ 휴화산 총선후 폭발할 수도

한나라당 이상득 국회부의장(이하 ‘이상득’)이 18대 총선의 뉴스메이커로 갑자기 부상하고 있다. 사태의 근원은 이상득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라는 사실에 있다. 정권 초기 대통령을 둘러싼 정권의 실세들이 권력 암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이상득의 이름이 최일선에 등장하곤 한다.

1935년생으로 올해 74세인 이상득은 이 대통령보다 5년 먼저 동지상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상득의 집안은 가난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포항 수재’로 이름을 날리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생인 이 대통령도 공부를 잘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 대통령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형만 가르치면 됐지 동생까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부모님의 생각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이 고등학교 3년 전 과정을 장학생으로 다닐 것을 조건으로 진학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득이 육사를 택한 것은 국비로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상득의 학력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득의 홈페이지를 보면 1955년에 포항 동지상고 졸업, 1957년 서울대 상대 입학, 1961년에 서울대 상대 졸업과 함께 코오롱에 입사한 것으로 돼 있다.

의문은 그가 서울대에 들어가기 전에 육사(14기)를 다녔다는 데서 비롯된다. 육사 2학년 재학 중 골절상을 입어 퇴교한 후 서울대에 재입학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육사 14기는 현 육사 교정인 화랑대에 입소한 첫 생도들이다. 이때가 1954년 6월이다. 육사 14기와 15기 시험을 모두 치른 민병돈 전 육사 교장에 따르면 육사는 11기부터 정규 4년제가 돼 학사자격을 준 데다 학비도 거의 없어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도 육사는 입학전형을 연말에 치렀다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상득은 1953년 말, 즉 고교 2학년 때 육사 시험을 치러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육사는 4년제여서 고졸(예정자)이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자만 응시할 수 있었다. 현재의 수능응시생 자격과 같다. 그런데 이상득은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그리고 고3이던 1954년 6월 육사에 입교해 고교 학적부에선 제적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득의 측근은 “야간 2학년 때 주간 고3 선배들과 시험을 봤다. 당시 이 부의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찍 지원했다가 합격했다. 당시만 해도 전쟁 직후라 고1이나 고2 재학 중에 육사에 입학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원 학력 미달인 이상득의 응시원서를 육사에서 받아줬다면 이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상득의 홈페이지에는 1955년 동지상고 졸업이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1957년 졸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상득은 육사 2학년 때 운동을 하다 팔을 다쳐 골절상으로 퇴교했다. 원래는 육사를 퇴교하면 곧바로 군대에 가야 하지만 병중이라 입대가 연기됐고, 1956년 12월에 동지상고 3학년에 복학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복학하자마자 곧바로 서울대에 응시해 합격한다. 서울대 응시 자격에 맞추기 위해 동지상고에 복학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 바 있다. 그가 동지상고를 실제로 졸업한 연도는 1957년이다. 그런데 왜 홈페이지에는 1955년 졸업으로 표기했는지도 역시 의문이다.

육사 퇴교 후 병역기록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병무청에서 발표한 그의 병역기록을 보면 1962년 12월26일 입영과 동시에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고 당일 전역한 것으로 돼 있다. 전역 사유는 ‘명예전역’으로 적혀 있고 국회 병역기록에는 ‘부대종군자처리’라고 돼 있다.

이상득 측은 이에 대해 “1961년 5·16이 나고 나서 육사 중퇴생과 6·25전쟁 종군자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입대와 함께 이병 제대 시키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 부의장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라고 했다.

1962년 10월1일, 전면 개정된 병역법 부칙 제14조에 ‘본법 시행 당시 사관생도 또는 간부후보생으로서 교육 중 퇴교된 자의 병역에 관한 사항은 국방부령으로 정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국방부령 75호에서 ‘장교후보생으로서 2개월 이상 교육을 받다 퇴교한 자 중에서 1927년 이후에 출생한 자는 제1보충역에 편입하고 계급은 이등병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국방부령 75호가 제정 시행된 날은 1963년 3월20일이다. 따라서 이 부의장의 이병 전역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상득이 이병 전역을 한 1962년 12월26일이면 그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코오롱에 입사한 지 1년이 넘었을 때다. 전역 시기도 5.16 등의 혼란한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이상득은 정치인이 되기 전에 경제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보다 앞선 길을 걸어 왔다. 이상득은 1961년 코오롱에 공채 1기로 입사해 17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계에는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경북 영일군, 울릉군)으로 당선돼며 입문했다. 이후 5선에 성공했고 97년 국회 운영위원장 및 한나라당 원내총무, 2004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거쳐 2006년부터 국회부의장을 맡았다. 이상득은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치다 보니 당내외에서 인맥이 넓기로 유명하다.

당 내에선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 당 밖에선 이 대통령의 경선 캠프 고문이었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워장과 친분이 두텁다.

최 위원장이 방통위원장 임명되는 데는 이상득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 최 위원장 임명에 언론 노조 등에서 현 정권의 언론 장악 의도가 깔려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한나라당내 민주계의 대표인사인 김덕룡 의원과는 한나라당 대선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러나 총선 공천 결과를 보면 박 전 부의장과 김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해 정치 현실의 냉혹성을 생각게 한다.

박 전 부의장과 김 의원이 한나라당의 중견 정치인으로서 이 대통령의 대선 경선 캠프에서는 역할이 필요했지만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의 보수 이미지를 고착시킬 수 있어 공천에서 탈락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득도 공천과정에서 ‘개혁 공천’의 걸림돌로 여겨져 공천에서 배제되거나 자진해서 총선출마를 포기하지 않겠나하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상득은 공천을 받았고 지난 달 25일 출마를 강행했다.

이상득은 “나의 경륜과 경험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안에서 대통력과 핏줄인 ‘형님 권력’을 흔들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과시한 셈이다. 이 대통령도 친형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이상득이 당내에 남아 있기를 바랬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당내 비주류로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된 이 대통령으로서는 당내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 대통령이 불리한 여론과 당내 소장파의 반발을 무릎 쓰고 이상득의 총선 출마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상득을 둘러싼 논란은 ‘휴화산’ 형태로 잠복했을 뿐 선거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상득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제기된 ‘이상득 배제론’을 정면 돌파한 데 이어, 지난 2월 23일 제기된 소장파 55명의 ‘2선 후퇴’ 요구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후보 등록을 마쳐 일단 정치적 생존에는 성공했다.

특히 지난 2월28일 영남 중진 물갈이를 명분으로 ‘형님의 희생’을 요구한 소장파의 ‘1차 반란’을 이방호 사무총장 등 공천심사위원회 내부 실력자들을 통해 처리했던 이상득이 이번에는 직접 전면에 나서 ‘성명파’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그와 경쟁자 관계였던 또 다른 핵심 실세 이재오 의원이 ‘이재오-이상득 동반사퇴론’에서 발을 빼면서 일단 한나라당 안에서 이상득을 견제할 정치세력은 당분간 부재상태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최다선 의원이라는 정치적 위상, 대통령의 친형이라는 ‘핏줄’만으로도 여권의 막후실력자로 대접받아온 이상득의 영향력이 더 확대될 것이라는 게 당 안팎의 중론이다.

더욱이 이 부의장은 ‘형님공천’ ‘상왕정치’ 의혹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면서 대통령조차 통제하기 힘든 존재임을 과시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이상득 부의장은 주요 당직자에게 자기 의견을 전달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지금 다 말할 수 없지만 여당 안에서 그는 정말 무서운 존재다”라고 말했다.

한 소장파 인사도 “이 부의장이 사장으로 있었던 코오롱 출신 김주성씨가 국정원 기조실장에 기용되는 등 청와대와 정부 인사에서 이상득 부의장과 가까운 인사들이 약진했다”며 “역대 정권 가운데 집권 초부터 친인척이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상득이 대통령도 어떻게 못하는 실세로 행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총선 공천 전후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 이상이 그의 사퇴를 바라고 있어 과연 총선 이후에도 이상득이 막후 실세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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