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3 12:49 (목)
불타고… 유랑하고… 파란만장한 수난사
상태바
불타고… 유랑하고… 파란만장한 수난사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4.27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떠돌이 ‘조선왕조실록’의 비극

임진왜란·일제강점·한국전쟁 거치며 훼손·강탈
실록 겪은 최초의 수난은 비둘기로 인한 火魔
왜란때 실록보관 4곳사고 왜군 진격로에 위치
3곳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전주 사고’만 남아

선조때 춘추관·묘향산등 4곳에 새로 사고 설치
적상산본, 한국전쟁 중 북한이 평양으로 가져가
日반출 오대산본 관동대지진때 불타 73책만 남아
끈질긴 환수운동 벌여 46책 93년만에 고국품에
현재도 보관장소 확정못하고 떠돌이 신세 우려

지난 2005년 북한은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리조실록(조선왕조실록)은 민족의 우수한 문화재”라며 한국전쟁 당시 어떻게 실록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겨졌는지를 소개했다.

서울 장서각에 보관돼 있던 실록 한 질이 북한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북한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도 되기 전인 1950년 7월 초 서울의 한 도서관 먼지속에 나뒹굴던 1천 8백여 권의 ‘리조실록’을 평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일성 주석은 교육부문 일꾼들을 최고사령부로 호출, “어떤 일이 있어도 실록을 꼭 구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고사령부는 군사 작전도에 ‘리조실록 구출 노정도’를 그려 넣고 수송을 담당할 군용차량을 배치했다. 각 부대와 관련 기관에는 실록 운반을 위한 ‘최고 사령관 명령’도 하달됐다. ‘우리민족끼리’는 ‘전쟁 역사상 유례없는 이 작전’으로 실록이 최고사령부에 안전하게 보관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북한의 김일성 대학에 소장돼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본래 묘향산 사고에 있던 것이 전라도 무주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다가 일제 때 서울 장서각에 다시 옮겨졌다. 적상산 사고본이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옮겨진 때가 1633년이니 417년 만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후 실록의 국역과 연구에 박차를 가해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1975년부터 국역작업을 시작했고 16년 만인 1991년 번역을 완료했다. 이것은 남한의 한글본보다 3년 앞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 대해 북한은 “그 양의 방대성과 사료적 가치로 인해 둘도 없이 귀중한 문화재, 세계 문헌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국보적 문화재”(조선대백과사전)로 평가하고 있다.

실록은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돼 문화재적 가치는 국가 차원을 넘어 세계적으로 공인되고 있다. 실록은 그 자체로 조선왕조 5백 년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실록이 겪었던 고난사를 생각할 때 그 가치와 소중함은 배가 된다고 할 것이다.

조선 왕조의 역사가 낱낱이 기록돼 있는 실록은 왜란과 호란, 내란, 일제 강점, 한국전쟁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강탈되고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그 수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실록은 왕의 몸과 동일시될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져 그 중요성을 감안해 경복궁 내 춘추관, 경상도 성주, 충청도 충주, 전라도 전주에 4질을 보관했다.

실록이 겪은 최초의 수난은 비둘기 때문에 화마(火魔)를 당한 일이다. 중종 33년인 1538년 실록을 보관하던 경상도 성주 사고에 화재가 나 실록이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실록 34년 1월 14일 기사에는 “관노 종말과 그의 아들 말이 등이 사고의 누극 위 중층에 산비둘기가 모여 잠자는 곳에서 불을 켜들고 그물을 쳐서 비둘기를 잡다가 불이 창 틈으로 떨어졌고 비둘기 둥우리로 인하여 불이 났는데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걷잡을 수 없이 타버렸다”고 적혀 있다.

비둘기 때문에 실록이 타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성주 사고본은 다른 사고의 실록을 바탕으로 복원해 같은 장소에서 계속 보관했다.

임진왜란 당시 4곳의 사고는 불운하게도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다. 성주 사고는 왜란 초기에 불에 태워졌다.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땅에 파묻었지만 결국 왜군에 발각돼 태워진 것이다.

서울로 가는 길목에 놓인 충주 사고도 왜군에 의해 모두 타버렸다. 충주 사고에 보관돼 있던 고려 이후의 귀중한 서책들까지 실록과 함께 사라졌다. 경복궁 안에 있던 춘추관 사고는 흥분한 백성들이 불태웠다.

실록 기록에 의하면, 왜군의 한양 입성이 임박하자 선조는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밤을 틈타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임금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백성들은 경복궁에 난입해 실록과 건물을 불태우고 노비문서도 불태웠다.

실록이 불타면서 승정원일기도 대부분 소실됐다. 실록이 국왕이 세상을 떠난 다음 정리된 2차 사료라면 승정원일기는 역대 국왕의 그날그날의 일과가 그대로 기록된 생생한 1차적 사료다.

마지막으로 남은 전주 사고본마저 없어진다면 조선왕조의 역사가 잊혀질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위기였다. 왜군이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했고 전주 사고본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었다. 의병장인 고경명이 왜군의 진격을 늦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주의 관리들은 실록의 보관 방법을 검토했지만 땅에 묻었다가 발각된 성주 사고본의 예에 따라 전주 사고본은 깊은 산 속으로 옮기기로 했다.

전주 인근 태인에 살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실록을 옮기는데 자원해 내장산 은봉암에 성공적으로 안치했다. 실록과 고려사를 63상자에 담아 수십 마리의 말에 실어 내장산으로 옮긴 것이다.

실록은 내장산 은봉암에서 보다 안전한 내장산 비래암으로 옮겨 1년 간 보관했다. 그러나 1593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 남원에 이르자 내장산도 안전한 곳이 못 됐다. 실록은 육로를 통해 충청도 아산, 해로를 통해 황해도 해주로 옮겨졌다가 마지막으로 강화도에 안착했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실록은 다시 묘향산으로 옮겨졌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10여 년 동안 무려 2000여 리를 유랑한 것이다.

왜란과 호란이 모두 끝난 후 선조는 1603년부터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선조 직전 왕)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4부씩 간행해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도 마이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해 보관했다.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1624)으로 모두 불탔다. 마이산 사고본은 1636년 병자호란 때 피해를 입었지만 보수 후 1678년 강화도 정족산 사고로 옮겼고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 전라도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다.

이후 네 곳에 보관된 실록은 조선 말까지 이렇다할 피해 없이 완전한 형태로 보관됐지만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본은 한일합방 전인 통감부 시절 이미 서울로 운반되기 시작해 1912년까지 조선총독부로 이관했다가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으로 옮겼고 해방 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됐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던 태백산본은 1984년 12월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사로 이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함께 위험에 처하는 만일의 상황을 피하고자 취해진 조치였다.

적상산 사고본은 총독부가 서울 장서각으로 옮긴 후 나라를 빼앗겨 창덕궁에 연금당하고 있던 이왕가에게 ‘기증’이라는 모멸스런 형식으로 인수시켰다.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 전쟁 중 북한이 평양으로 가져가 현재 김일성대학에 보관되고 있는 실록이다.

실록의 여러 사고본 중 가장 기구한 운명을 지닌 것은 오대산 사고본이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적상산본은 모진 수난에도 국내에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월정사 오대산본은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는다며 일제가 1914년 3월 도쿄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실어갔다.

그 때의 상황이 ‘월정사 사적기’에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서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됐는데 3일에 시작해 11일에 역사를 끝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으로 반출된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대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 도쿄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관동대지진 때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연구실에 대출된 73책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중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는데 그 경위는 알 수 없고 46책이 도쿄대에 계속 보관됐다.

오대산 사고가 있던 월정사를 중심으로 도쿄대에 남아 있는 오대산 사고본 46책에 대한 환수 운동이 벌어졌고 도쿄대는 ‘기증’이라는 형식으로 지난해 7월 14일 서울대에 오대산 사고본을 반환했다. 국내 반환 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0월까지 일반 전시를 했다.

일반 전시 후 오대산본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본지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실무 간사를 맡았던 월정사 법상 스님에게 확인한 결과 고궁박물관에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져 현재 영인작업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9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오대산본은 국내에 돌아와서도 시련은 계속 되고 있다. 고궁박물관 전시가 끝난 후 오대산본의 보관 장소를 놓고 서울대 측과 월정사 측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측은 규장각에서 기존에 보관해온 오대산본 27책과 반환된 오대산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연구를 위해서 규장각에 보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규장각 측에서 문화재청과 월정사의 동의 없이 반환된 오대산본에 서울대 규장각인을 날인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서울대 측은 이에 대해,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했기 때문에 오대산본에 대한 관리권한이 서울대에 있는 것으로 판단, 규장각인을 날인했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 진다.

오대산본 46책의 영구 보관장소는 문화재청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합의가 돼 있는 상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지난해 8월 월정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데 그 조건이 항온·항습시설 등 보관조건을 완벽하게 갖춰야하는 것”이라며 “월정사와 협의해 오대산에 조선왕조실록기념관을 세울 계획이 서 있다”는 말로 오대산 보관 의사를 밝혔다. 유청장은 또 “(강원)지역의 염원을 확인한 만큼 여러분들을 섭섭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아직 문화재청은 오대산본의 영구 보관장소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법상 스님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월정사 성보박물관이나 오대산 사고가 현재 상태로는 최적의 보관 장소가 되기 어려워 리모델링을 문화재청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히며 “오대산 사고본을 원래 있던 장소에 돌려 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도 유력한 보관 장소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도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