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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언제 하니?” 추석 잔소리에 ‘비혼주의’ 선언해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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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언제 하니?” 추석 잔소리에 ‘비혼주의’ 선언해본 후기
  • 이유나 기자
  • 승인 2019.09.13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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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캐스트, SISACAST= 이유나 기자)

할머니, 저 절대로 결혼 안 할 거예요. 저 비혼주의거든요.”

이 발언은 추석 연휴 저녁, 친조부모댁 거실에서 가족들이 과일을 깎아 먹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기자가 폭탄처럼 낙하시킨 자유선언이었다.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기자는 가족들이 전부 모여있는 가운데 조부모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을 비혼주의를 공표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부터 몇 년 내리 들어온 나이도 찼으니 이제 결혼해야지라는 잔소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조부모님은 질색팔색 했고, 몇몇 어른들은 이런 말 하는 애들이 꼭 먼저 결혼한다는 조롱으로 나의 비혼 선언에 응수했다.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어른들의 반응에 놀랍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앞섰다. 가족들의 이해는 필요치 않았으나,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내 가치관을 부정당하는 것은 무척 피곤하게 느껴졌다.

최근 결혼을 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비혼주의2030세대에서 확산되고 있다.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필수라고 여겨왔던 과거와 달리, 연애와 결혼이 선택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비혼은 자신의 삶에 더 집중하고 싶은 청년들의 가치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라이프스타일 유형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박한 사회초년기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중장년층은 비혼이 확산되는 현상에 반기를 드는 경향을 보인다. 삶의 주체성과 진취성을 추구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되려 게으르고 비겁하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결혼 적령기라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 접어든 청년들이 명절만 되면 원치 않게 요주의 인물이 되는 이유다. 때문에 매년 결혼 언제 하냐는 닦달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명절 잔소리 대처법을 묻거나 공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제까지는 항상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걸로 가족들의 결혼 질문 공세에 대처해왔다. 이번 연휴만큼은 나의 당찬 비혼 선언으로 지루하기만 했던 집구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비혼주의를 마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돌고있는 역병처럼 취급하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들었지만, 거기에 일일이 대꾸하기 보다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어봤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거야... 남편 제대로 모시고 아이도 키우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한다.”

할머니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손녀에게 몸종과 다름없게 들리는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했다. 토씨 하나 안틀리고 할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런. 할머니가 생각하는 몸종의 삶을 살지 않는 대가가 죽을 때 후회한다에 불과하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문득 저는 가족에게 헌신하는 것 대신 혼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자유롭게 살 거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신 여자로서의 억압된 삶을 그대로 살아온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때 큰아버지가 모든 세대는 전통을 따라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고리타분한 말을 시전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남자사촌이 왜 대를 꼭 이어야 하냐며 발끈했고, 다른 사촌은 애 낳고 돈 때문에 허덕이면 우리 인생을 어른들이 대신 살아주실 거냐며 반발했다. 집안 어른vs손자들의 첨예한 갈등 구도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어른들은 당신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청년들도 국가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거듭 주장했다. 여기서 어른들이 말하는 청년들의 의무는 바로 결혼과 출산이었다. 결혼과 출산. ‘부모보다 못사는 자식 세대’ ‘건국 이래 최악의 세대라고 불리우는 요즘 청년들이 풀기에는 무척 버거운 숙제들이다. 취업난, 거주난 등 여러 사회적 어려움에 처한 청년세대를 기성세대와 동일선상에 놓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가족끼리 니 말이 틀리고 내 말이 맞다 티격태격던 와중이었다. 옆에 앉아계시던 종조할아버지(할아버지의 남동생)께서 내게 결혼 그까짓 거 안해도 된다. 너희들 맘대로 살아라며 귓속말을 해오셨다. 이어 손을 꼭 잡아오시는 행동에, 왠지 모르게 나의 비혼 인생이 인정받고 지지받는 느낌이었다. 비록 비혼 선언에도 불구하고 집안 어른들의 잔소리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지만, 내 결정을 이해해주는 어른이 한분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만족감과 위안을 안겨주었다.

세대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해소하기 무척 까다롭다. 기성세대들은 자녀들의 외로운 인생과 저조한 출산율을 걱정하지만, 청년세대들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며 서로 다른 이상향을 가진다. 이렇게 두 세대는 다르지만, 서로간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이 서로를 점차 이해해나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 아닐까.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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