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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曲 만들고 그녀가 노래 부르면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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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曲 만들고 그녀가 노래 부르면 역사가 됐다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4.28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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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의 쌍두마차 신중현·김정미

“10만원으로 10억이상 가치있는 음악 창조” 찬사
 김정미, 신중현의 분노·도전정신 살려낸 주인공
 모든 장르 넘나든 ‘백미’, ‘리듬온’에서 음반 재발매

‘마법의 도가니’와도 같은 두 이름 김정미와 신중현.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올 듯한 음악의 여신과 남신의 만남을 연상시킨다. 필자는 이 두 사람의 ‘음악적 정체’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세계 최고의 인기 가수라는 ‘셀린 디온’의 내한 공연을 보게 됐다.

셀린 디온은 확실히 노래를 잘 했다. 공연 내내 한 순간도 관객들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셀린 디온의 보컬 뿐 아니라 무대 장치와 조명, 밴드의 연주, 댄서들의 안무 등 공연의 모든 요소들이 팝의 본고장 미국의 선진 음악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필자는 관객의 열띤 환호 속에 현란하게 펼쳐지는 그녀의 공연을 눈으로 보면서 머리로는 김정미와 신중현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셀린 디온의 공연장에서 내려진 결론은 셀린 디온이 10억으로 10억 가치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면 김정미와 신중현은 10만 원으로 ‘10억의 배가 넘는’ 가치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셀린 디온이 부른 세계적 히트곡들은 유행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한 때’의 노래인 반면 신중현이 만들고 김정미가 부른 곡들은 시대를 초월해 그 가치가 끊임없이 재발견 되는 중이어서 그렇다.

김정미를 신중현과 실과 바늘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는 신중현이 없었다면 김정미도 없었을 것이고 김정미가 없었다면 신중현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이 상당 부분 가벼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미와 신중현은 서로에게 폭발적 화학작용을 일으킨 촉매제였다.

신중현은 김정미에 대해 자신이 발굴한 숱한 여가수 중 가장 인기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정미가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신중현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가장 충실히 구현해 낸 가수로 김정미를 꼽고 있다.

신중현의 음악적 이상은 ‘사이키델릭’과 한국의 전통 국악이 그 두 가지 양상이다. 사이키델릭은 신중현이 추구했던 장르상의 이상이라 할 수 있겠고 전통 국악은 음악적 원류로서의 이상이라 여겨진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두 가지 음악적 이상을 그가 요구하는 그대로 신들린 무당처럼 소름끼치게 불러 제쳤다.

필자는 김정미의 음악을 듣고 고민하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듯 ‘음악의 역사도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김정미의 음악에 관한 몇 가지 편견이 굳어져 있는 것도 발견했다.

신중현과 김정미의 관계는 전체집합과 부분집합의 관계와 같다. 특히 김정미는 신중현의 여러 부분 집합 중 가장 유력하고 독보적인 그것이다. 전체집합이 정의를 구명하지 않고 부분집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총론(신중현)이 각론(김정미)에 앞서야 하는 이유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 하고 신중현을 ‘한국 락의 대부’라고들 한다. 바흐와 신중현, 모두 ‘아버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독일 사람인 바흐는 생존 당시 독일 보다 음악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의 음악가, 특히 비발디에게서 작곡의 방식을 채용했다. 그러나 형식을 빌린 것이지 형식 안에 담긴 내용은 독일적인 것으로 채웠기에 모방을 넘은 창조에 이를 수 있었다.

신중현은 1950년대 말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 섰고 1963년 한국 최초의 락 밴드 ‘애드 훠(Add4)’를 결성했다. 락은 본래 서구 태생의 장르다. 신중현이 ‘한국 락’의 대부로 추앙되는 것은 서구의 형식에 한국인의 정서와 얼을 담고 전통 리듬을 접목시켜 한국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음악의 재발견’이라는 면에서도 바흐와 신중현은 일치한다. 바흐 최대의 걸작인 ‘마태오 수난곡’이 멘델스 존에 의해 잊혀진지 꼭 100년 만에 재발견됐고 첼로 연주의 구약성경이 된 ‘무반주 첼로’는 스패인의 고서점에서 100년 이상 잠들어 있다 파블로 카잘스가 발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신중현의 음악적 신화는 아직 먼지에 쌓여 있다. 세상이 그에 대해 알려 하는 것은 떠도는 풍문 수준에 불과하다.

바흐에게 멘델스 존과 파블로 카잘스가 있었다면 신중현에게는 ‘리듬 온’이 있다. ‘리듬 온’이 먼지에 쌓여 있는 신중현의 실체를 파헤치는 일에 본격 나섰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여신’ 김정미 음반 재발매 작업이다.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며 ‘김정미의 음악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까지는 무려 3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야 했다’는 신중현의 발언을 접했다. 필자의 관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김정미의 재발견은 그 자체로 확실한 의미가 있거니와 신중현 음악의 실체를 밝히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김정미는 누구인가?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도 ‘제2의 김추자’라는 고리타분하고 천편일률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김정미와 김추자는 음악의 ‘스탠더드’가 전혀 달라 비교의 대상부터 될 수 없다. 김추자는 대중적 인기에서야 신중현 사단의 지존이었지만 상업적 성공의 주인공 이상은 결코 아니다.
김정미는 애초부터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의 음악 여신이라 불러야 할 만큼 신중현의 음악적 분노와 도전, 실험과 모험의 오롯한 매개자였다.

그녀가 신중현 사단의 숱한 가수들과는 사뭇 달리 스타 근성이나 쇼맨십을 버린 채 며칠 씩 반복된 연습을 꿋꿋하게 참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정미를 ‘사이키델릭의 여제’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녀의 ‘대표곡’ 몇 곡만을 듣고 손쉽게 내리는 일면적 평가에 불과하다. ‘리듬 온’에서 발매되는 김정미의 음반들은 김정미가 신중현이 시도한 모든 음악 장르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이키델릭은 물론이고 소울과 스윙, 펑키와 째즈 그리고 국악까지도 아우른다. 30년이 걸려 김정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시작됐다면 ‘리듬 온’의 노력으로 완결된 평가가 가능해질 것 같다. 

1972~73년 무렵 발표된 김정미의 ‘최신가요 2집’, ‘최신 앨범, 바람’, ‘간다고 하지 마오, 아니야’ 석 장의 음반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예측을 불허하고 질풍노도 같으며 종횡무진 펼쳐진다.
 
1971년 신중현이 공개 오디션을 통해 당시 고3이던 김정미를 택했을 때 벌써 예견됐던 일이다. 남인수가 일제시대 오디션을 통해 음반을 취입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완전 공개 오디션은 신중현이 한국 최초로 도입했고 이 점에서도 그의 탁월성은 돋보인다.

김정미 최초의 앨범 ‘신중현 사운드 vol2’(1971년)와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여 사이에 김정미는 신인티를 완전히 벗고 확신에찬 음성으로 노래하고 있다.

‘최신가요 2집’은 전체적으로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다. ‘잊어야 한다면’은 소울풍이고 ‘간다고 하지 마오’는 펑키, ‘언제나’는 스윙의 분위기가 감돈다. 째즈 스타일의 ‘곁에 와 주오’와 약간 통속적이라 할 ‘기다리는 마음’, ‘잊었던 사랑’도 들을 수 있다.

신중현이 ‘더 멘’을 결성하며 영입한 클래식 전공자 손학래의 오보에가 음반 거의 전곡에 깔리고 있는데 70년대 초반이라는 시점에서는 파격적인 동시에 음반의 품격을 높이는 듯하다.

김정미의 보컬은 허스키하고도 대담하며 흐릿하게 꺾어지는 모음은 사이키델릭의 전조를 암시한다. ‘못 잊어’는 김정미와 신중현이 이뤄낸 사이키델릭 최대의 폭발물이다.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오보에 어느 악기도 주도하지 않고 일체로 몽롱한 오케스트라적 조화를 이루는 위에 주술적이고 퇴폐적이며 절규하는 듯한 김정미의 보컬이 아지랑이 일듯 떠 다닌다.

신중현 실험정신의 결정판인 ‘못 잊어’는 ‘바람’보다 한 차원 높은 곡이다. ‘바람’은 김정미의 대표곡처럼 습관적으로 지목되지만 ‘바람’이 2차원으로 평면적이라면 ‘못 잊어’는 3차원의 감각적 입체음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신 앨범’은 신중현이 일생을 통해 갈구한 사이키델릭과 한국 전통 음악의 두 세계가 공존하는 특이한 음반이다. ‘바람’과 ‘아름다운 강산’, ‘추억’이 사이키델릭적인 곡이라면 나머지 곡들은 일관되게 전통 국악을 서구의 락에 접목해 ‘한국 락’을 열어 보이고 있다.

‘바람’과 ‘아름다운 강산’은 김정미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걸작이다. ‘더 멘’은 두 곡을 같은 진용으로 연주하고 있다.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 베이스, 드럼이 독주의 경연을 벌이듯 대화체로 진행되며 건반은 빠진다.

신중현의 연주로 짐작되는 리드 기타는 단연 압권이지만 곡의 상승과 반전, 하강을 주도하는 베이스가 놀랍다. 아일랜드 출신의 U2가 1987년 발표한 ‘With or without you’베이스 연주의 모델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시대를 앞서간 신중현의 천재성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미의 ‘아름다운 강산’을 ‘신중현과 더 멘’버전과 비교해 들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김정미의 보컬 능력과 신중현의 투철한 프로정신이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더 멘’버전의 ‘아름다운 강산’은 밴드 음악답게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면서 탄력있고 선이 굵은 연주가 중심이 되는 반면 김정미의 곡은 솔로 보컬을 도드라지게 강조하기 위해 연주가 건조하고 속도감이 있다. 김정미는 신중현의 의도에 부응하듯 또렷하고 도발적인 발음으로 자신의 보컬 능력을 십분 과시한다.

‘최신 앨범’의 나머지 곡들은 5음계의 국악 멜로디가 원용되고 있다. ‘비가 오네’는 구성진 트롯 풍이며 ‘불어라 봄바람’은 ‘자진모리’가락이 떠오른다. ‘어디서 어디까지’, ‘나도 몰래’, ‘당신의 꿈’의 기타는 가야금 연주음에 조율돼 있다.

이 음반의’고독한 마음’은 ‘간다고 하지마오, 아니야’음반에 수록된 동명의 곡과 편곡이 완전히 다른데 ‘최신 앨범’의 전체적인 곡 배열에 맞춰 의도적으로 전자악기인 건반을 뺐고 기타도 가야금 줄을 튕기는 것 같다. ‘최신 앨범’에서는 ‘추억’에만 건반이 등장한다. 음반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신중현의 세심한 장인정신과 김정미의 빼어난 해석능력이 녹아 있다.

‘간다고 하지마오, 아니야’음반에서는 ‘아니야’와 ‘오솔길을 따라서’가 선정적인 드럼 비트와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작 ‘Arnold Layne’에서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출렁이는 건반이 강한 인상을 준다.
 
‘고독한 마음’과 ‘만나고 헤어진다면’은 건반과 기타로 전주가 시작돼 베이스와 드럼이 가세하는 교과서적인 기승전결의 탄탄한 전개가 눈에 띄고 어떤 연주 패턴도 능수능란하게 소화해 내는 김정미의 카멜레온적 보컬에 압도당한다.

음반 전체의 완성도와 새로운 도전정신이 ‘명반’의 기준이라면 ‘리듬 온’에서 발매한 김정미의 음반들이야말로 명반 중의 명반으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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