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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것들] 마술로 덧칠한 캔버스 미학의 위대함, '베르나르 뷔페'展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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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것들] 마술로 덧칠한 캔버스 미학의 위대함, '베르나르 뷔페'展 3/3
  • 양태진 기자
  • 승인 2019.11.30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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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이어 한국에서는 첫 단독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베르나르 뷔페' 사후 20주년 대규모 회고전.
그 세 번 째 시간으로 20세기 최고이자 마지막 구상회화 작가로서 그가 남긴 대작들을 만나보자.

(시사캐스트, SISACAST= 양태진 기자)

예전 셀럽이면 누구나 뷔페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했다는 일화 중 하나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디올'은 1955년, '베르나르 뷔페'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한다.

당시에는 70대의 거장 '피카소'가 주목받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그의 대항마로까지 불리던 30대 청년,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은 셀럽을 비롯한 모든 이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레코 이후의 추기경 심문>, 1987년 & <뒷모습의 누드>, 1990년 (상단)
<프란스 할스 이후>,1987년 & <제국의 장교 II>, 1987년 (하단)

"해마다 봄이 오면 나는 베르나르가 연례 전시를 위해 몰두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애가 탄다. 이번에도 그랬다. 습관처럼 강렬한 호기심으로 그의 작업실 문을 열었다.

작업대에는 <집>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매우 꼼꼼하게 그렸는데, 이번에는 그런 방식으로 집의 풍경과 실내의 모습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이 집이 가진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다.

베르나르에게 집은 작품을 창작하는 아틀리에와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휴식 공간이 함께 응축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아마도 폭력을 가하는 사회로부터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서 집의 비범성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이 주는 평안한 삶은 그가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열정과 고요함을 제공해주었다.

그렇다. 베르나르가 우리를 초대하는 이 집은 그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곳의 따뜻한 햇살은 나의 영혼도 함께 비추어준다. 이 모든 것은 베르나르가 내게 준 무한하면서도 소중한 선물, 사랑이다..."

- 아나벨 뷔페

 

"그에겐 돌들마저 영혼을 가지고 있었고, 내 눈에 이 그림들은 초상화였다. 혁명 속에서도 지켜진, 그리고 마지막 전쟁 동안 벌어진 비인간적 잔혹함에 포위되어서도, 그들의 삶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끝내 보호된 이 걸작에 대한 찬미를 이야기 하기 위한 것이다." - 아나벨 뷔페
좌측 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체스메 교회>, 1992년 작 & <생 니콜라스 교회, 상트페테르부르크>, 1992년 작.(상단) <록펠러 센터, 뉴욕 풍경>, 1989년 작 & <브룩클린 브릿지, 뉴욕 풍경>, 1989년 작.(중간) <마르크 기차역>, 1970년 작. & <퐁투아즈(파리 북서부 교외의 도시), 생 마클루 성당>, 1976년 작.(하단)

베르나르 뷔페는 일생동안 유명한 도시들을 많이 그렸는데, 주로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를 선택하여 화폭에 담았다.

1956년 파리의 풍경을 시작으로 뉴욕, 베니스, 런던 그리고 자신의 회고전이 열렸던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그렸으며, 프랑스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몽 생 미셸이나 루아르 성 같은 곳 역시 캔버스에 담았다.

뷔페는 풍경화를 통해 매우 정교한 건축학적 드로잉을 시적 감각으로 보여준다. 그림 전반에서 풍기는 엄격한 분위기는 시기에 따라 강도는 다르지만 각 장소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프랑스 풍경화의 경우, 1950년대 작품들은 엄숙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 1980년대 작품들은 훨씬 밝고 명랑한 특징을 보여준다.

<타워 브릿지, 런던>, 1972년 작. & <쉬농소 성>, 1969년 작.(상단)
<메스놀즈, 슈브로즈 도로>, 1976년 작. & <생 말로 연안의 범선>, 1972년 작.(중간)
<몽 생 - 미쉘>, 1971년 작. & <생 캐스트, 계곡>, 1968년 작.(하단)

"1958년에 그려진 뉴욕의 풍경들과 1990년에 고층 빌딩들을 그린 뉴욕의 <마천루> 시리즈를 비교해 보았다. 이 작업은 베르나르가 지나온 길과 오랜 시간 다져온 그의 능력을 가늠하게 해준다.

베르나르 안에 내재하고 있던 건축에 대한 호기심은 분명 전시 주제를 선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는 나에게 그가 한 말이다.

지난 뉴욕 여행이 기억난다. 내가 보기에 다수의 '아메리칸 드림' 추종자를 기분 나쁘게 할 위험을 무릅쓰며 베르나르가 그리고자 한 풍경은 그곳의 진정한 초상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로봇 같은 건물들처럼 쉽게 붕괴되지 않는 달러 제국의 막강함과 그 결연함에 대한 외침, 여기저기 널려있는 더러움과 불행이 우글거리는 거리, 대리석과 네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랑스러워하는 영혼 없는 금속 같은 빌딩들의 시체를 본다. 그들은 하늘에 도전하기 위해 더 높이 몸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사람들은 잊어버린다.

이 빌딩들은 거대하고 멋지며 심지어 장엄해 보이지만, 혼자 외롭게 서있는 수호자인 자유의 여신상이 밝혀주는 유토피아에 비인간적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 아나벨 뷔페

 

우측 부터, <브르타뉴 여인과 갑각류>, 1994년 작 외.(상단)
<브르타뉴 브레아 섬의 클로 항구>, 1990년 작 확대 모습.(하단)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자유와 창의성의 상징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베르나르에게도 그랬다. 이 도시는 또한 슬라브족의 요람이며, 그들의 문화와 권위, 지나친 극단주의와 아량이자 용기이다. 이 모든 것을 베르나르는 그의 그림을 통해 찬양하려 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이 도시가 불멸하기를 원했다.

나는 이 도시가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 베르나르와 내가 공유한 순간들은 너무도 가슴 벅찬 추억이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 베르나르의 회고전을 알리는 오프닝 파티와 공식 연설이 있었던 다음날, 나는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러 오기 전에 다시 에르미타주로 돌아가 보자고 했다. 그에게 헌정된 거대한 전시실 문턱에 머물며, 나는 그가 늘 원했던 대로 홀로 전시실을 거닐고 있는 그를 지켜보았다.

45년을 함께한 그림들과의 대면은 그를 깊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완벽을 추구하는 특유의 엄격함과 근엄함 가득한 눈빛을 하고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모든게 괜찮은지 물어봤고, 그의 얼굴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보았다. 그의 답변은 겨우 세 개의 단어로 가벼웠다.

'만족해.'

만족? 드디어!"

- 아나벨 뷔페, 1992년

 

상단 좌측부터, <생 라자르역에서의 엄마와 어린 나> 외 1, 중간의 <이탈리아의 추억, 아말피 대성당> 외 1, <에펠탑, 파리> 외 2.

오디세이 신화와 해저 2만리

오디세이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850년 경에 쓴 신화적인 작품이다. 이타카 왕이자 영웅인 율리시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떠난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바다와 육지에서 많은 위험과 마주하게 된다.

사이렌들은 노래를 불러 그의 배가 충돌할 수 있는 위험한 곳으로 가도록 유혹하고, 요정 칼립소는 그를 섬에 가두기도 한다.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율리시스가 죽었다고 믿는 모든 구혼자들의 청혼을 거부하지만 그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만다.

왕국으로 돌아온 율리시스는 모든 구혼자들을 처단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그만이 쓸 수 있는 활을 쏘아야만 했다. 이 증명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이타카의 왕좌와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좌측의 <오디세이-플루트 연주자>, 1993년 작.

"단테의 <지옥>과 <돈키호테> 그리고 <해저 2만리>를 거쳐 온 그였기에 율리시스의 발자취를 선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작품을 구성하는 베르나르의 뛰어난 솜씨나 데생의 수준 혹은 색의 섬세함에 대해 묘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 최근에 그려진 그림들에서 보이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갈망과 탐욕스러운 관능성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베르나르는 율리시스를 고갈되지 않은 젊음을 지닌 사람으로 표현하여 보여준다. 그래서 키르케와 칼립소가 이 멋있고 매혹적인 사람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열중하는 것이 놀랍지 않으며, 스케리아 섬에 표류된 그를 정성껏 보살펴준 나우시카의 심정에 대해서도 공감이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쁨과 하모니로 환하게 빛나는 베르나르의 이 멋진 캔버스를 볼 때 율리시스의 아내인 페넬로페가 그랬던 것처럼, 내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혹은 찬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 아나벨 뷔페

 

<오디세이-율리시즈 호>, 1993년 작.(상단)
<오디세이-사이렌>, 1993년 작.(하단) 

베르나르의 만화적인 스타일은 1989년에 그린 <해저 2만리-노틸러스호의 거대한 현창>에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1870년에 쓰인 쥘 베른 소설의 삽화로 그렸다. 네모 선장은 해저를 탐험하기 위해 눈부시게 앞선 기술로 노틸러스라는 해저 거인을 만든다. 이후 네모 선장은 세상과 단절된 채 바다 저 깊은 곳을 탐험하며 평온을 찾고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된다. 베르나르 뷔페는 네모 선장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해저 내부, 아주 럭셔리한 부르주아식 방의 거대한 현창 덕분에 그는 해저 생물을 관찰하게 된다. 베르나르 뷔페는 이 주제 덕분에 여러 종의 어류와 다른 해양생물을 선보일 수 있게 된다. 그는 항상 자연과학, 동물과 곤충 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베르나르 뷔페의 말년에 걸친 대작의 제작 과정 중의 모습(상단)과 그 실제 작품 모습.(하단)

"나는 베르나르가 창조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소진하고자 견뎌내야 했던 작업의 강도를 이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의 영감은 무의식에서 자라났고, 마치 자신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까지 일하고 나서야 느끼는 행복처럼 그의 상처들마저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의 자기 희생은 다른 직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는 지금 베르나르의 예술 창작 과정을 분석하려는게 아니다. 미스터리한 것으로 머물러야 하는 그 과정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베르나르가 나를 사랑받는, 하지만 쓸모없는 관객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보고 겪은 것, 그와 함께 공유했던 것들, 내가 종종 짐작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잘했던 점이 있었다면 베르나르에게 그림은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가 그림과 마주하고 있을 때 굳이 내가 낄 자리를 만들려 하지 않아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 아나벨 뷔페

 

찬란한 피날레

<음악광대들>은 미쳐가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만화 스타일을 통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89년 부터 1999년 사이 베르나르 뷔페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인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표현적인 면에서 현실성이 다소 부족하고 덜 엄격하지만, 주제는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었다.

베르나르 뷔페는 자신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몸을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 가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그림을 빈번하게 그렸다.

1998년 그는 <드래그 퀸>과 <복장 도착 해골>을 그렸고, 1999년에는 마치 회반죽처럼 매우 두텁게 물감을 올리고 대담한 색상을 사용한 <죽음 La Mart>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24점 그렸다. <죽음 10>도 그중 한 작품이다.

해골들은 르네상스 스타일의 궁중 예복을 겹겹이 입고 있다. 죽음을 예고하는 어두운 주제와 표현에도 불구하고 해골들이 잉태를 했다거나 장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과학이 발전해서 달나라 여행이 가능해지고, 추상미술이 도래하더라도, 내가 '페인팅' 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 베르나르 뷔페

이상,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과 함께 그 역사 속 분위기가 녹아든 전시장을 거닐다 보니, 출구가 보일 때 즈음, 한층 더 숙연해진 관람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미적 예술의 깊이가 더해진 일상을 보낸 만큼, 이후의 시간도 예술로 승화되길. 세상이 변해도 캔버스에 그려진 누군가의 페인팅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란 베르나르 뷔페의 마지막 말처럼, 위대한 예술은 영원한 관객을 통해 회자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전시 예술의 미래 또한 밝은 이유다.

 

*베르나르 뷔페는 누구? : 프랑스 유명 미술학교인 에꼴 데 보자르에 조기 입학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뷔페는 1948년 19살, 어린 나이에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일약 대스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그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고, 세계 2차대전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공포 속에 살았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과 그릴 것만 찾아다녀야 했다."고 말하며 뷔페는 작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고, 그는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소재로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계속된 그의 작업이 점차 대중들의 많은 호응을 받고 부를 축적하며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지만 비평가들은 화려한 그의 삶을 비난하며 등을 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파킨슨병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희노애락을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뷔페는 생전 프랑스의 문화훈장을 2번이나 수여 받았고, 단연 20세기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다.

(자료제공=HANSOL B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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