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킹 오브 로큰롤'. 그런 그가 대표곡 'Tutti Frutti'를 연주할 때면, '리틀 리차드'만의 신들린 피아노와 독보적 샤우팅으로 '50년대의 농익은 리듬에 모두를 넣고 하나로 갈아버렸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양태진 기자)
흥겨운 리듬 속 재기발랄한 기운이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상상으로 달굼도 모자라, 온몸을 흥분의 에너지로 뒤덮어 버린다.
락. 앤. 롤.
음악이란 예술이 오랜시간 자랑 삼아온, 간결하면서도 반복된 진행에 가슴 뛰는 리듬을 섞어 발현해낸 이 장르는 서구의 대표 사운드 중 하나로서, 특유의 삼바 리듬이 초절정으로 치닫는 브라질 음악을 비롯, 심장의 고동소리가 뼛 속까지 스미는 아프리카의 토속 리듬에 이어,
대한한국 놀이패의 신명나는 춤사위가 곳곳의 황홀경으로 휘몰아치던 어느 날, 미국 흑인 음악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블루스'와 '가스펠'은 백인들의 오랜 '컨트리풍'과 조우하면서, 가히 격렬하다 못해 생동감이 넘쳐나는 이 '로큰롤'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 인기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어느 '50년대 초반, '로큰롤' 역사를 현시점으로부터 되짚어내는 순간에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리틀 리차드'. 그런 그가 지난해 88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지금, 그의 베스트 앨범 중 하나와 더불어, 그의 발자취를 두루 살피는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봤다.
로큰롤 부흥기를 주도했던, '리듬앤블루스'*의 대명사, 킹 오브 락앤롤! '리틀 리차드'
단순한 리듬이 반복되는 구조 안에서 자유로운 운율과 흥을 최대치로 구사한다는 건, 웬만한 음악적 감각과 깊이 아니고선 결코 쉽지 않은 터. 이런 난이도 최고치의 창작성을 주요 무기 삼아, 강렬한 허스키-보이스*를 쉴새없이 내뿜어대던 '리틀 리차드'만의 로큰롤 에너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듯, 보기 드문 흥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었다.
"'리듬앤블루스'가 아이를 잉태했다면, 그것이 바로 '로큰롤'일 것이다."
- Little Richard
이 몇 마디의 말을 시작으로, "와빠바루마~발라빠빠"*라는 정체불명의 추임새를 넣기 시작하더니만, 그 유명한 '투티 프루티'를 외쳐대던 '리틀 리차드'. 그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 Roll Hall of Fame)' 콘서트*에서의 눈부신 퍼포먼스는 그만의 '로큰롤' 진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놀라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리듬 앤 블루스 : 약칭, '알앤비(R&B)'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1940년대 말 미국 내 흑인들의 '블루스'와 '가스펠' 장르에 댄스풍의 스윙 리듬이 더해진 것으로서, 1950년 대의 '로큰롤', '펑크(funk)' 등으로 그 영역이 확대 됐다. 그루브와 리듬이 조합되며 나타나는 흥겨운 느낌이 강한 편으로 보컬의 자율성과 즉흥성 또한 극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 허스키-보이스 : 현대 록 음악의 보컬 기법인 '샤우팅'과 '그로울링'의 시초로 일컬어지며, '폴 매카트니'와 같은 60년대 록스타들이 이 '리틀 리차드'만의 괴성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 "와빠바루마, 발라빠빠! (A-wop-bom-a-loo-mop-a-lomp-bom-bom!)" : 이 울부짖는 도입부는 록큰롤 음악의 표본으로서도 거론되는 것으로서 당시 아프리카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가로 엄청난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었다. '롤링 스톤' 또한 이 부분을 동시대 록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선사해 준 가사라 칭한 바 있다.
1932년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태어난, 본명 '리처드 웨인 페니먼(Richard Wayne Penniman)'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목사인 집 안에서 자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가짜 술 제조 혐의로 체포까지되는데, 아들인 그도 그런 영향을 받은건지 말썽 많은 소년으로 그 지역 내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더 큰 유명인으로서 거듭나는 시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와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때. 이 시기부터 그는 '다이내믹 창법'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독보적 열창 스킬로 그 지역 주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이에 더해 당시 성행하던 유랑 극단에 들어간 그는 춤과 노래를 선보이며 전국 각지를 순회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열 다섯살이 되던 해, 그는 마침내 작은 펍 밴드의 고정 멤버로 활약, 이듬해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인 발굴 오디션에 지원하면서 우승! 첫 레코딩의 기회를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1951년도의 첫 싱글 <Every Hour>.
이러한 'RCA'에서의 발표 이후에도 '리틀 리차드'는 레스토랑의 접시닦이나 클럽 내 여장 연주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 유지를 해 가는데 그러던 어느 날, 스페셜 레코드사의 사장 '아트 루페(Art Rupe)'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찾아오고, 마침내 1955년, 뉴올리언스의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역사적인 곡, '투티 프루티 (Tutti Frutti)' 탄생의 서막이었던 것.
몇 번의 재녹음 끝에 찾아온 '리틀 리차드'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샤우팅 그대로 녹음되었던 바, 이 도입부가 반영된 'Tutti Frutti'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 당시 빌보드의 R&B 차트 2위, 팝 차트 17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른다.
"나의 가장 큰 업적은 이 곡, '투티 프루티 (Tutti Frutti)'*입니다. 이 곡이 저를 부엌 밖으로 안내해 주었죠. 접시닦이로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일주일에 고작 10달러를 벌었어요. 이 곡은 제게 축복이자 교훈인 것입니다. 신께 감사드려요"
- 리틀 리처드, '모조'와의 인터뷰에서.
이후, 'Long Tall Sally (키다리 샐리)', 'Lucille(루실)', 'Jenny, Jenny (제니 제니)', 'Good Golly, Miss Molly', 'Rip It Up' 등, 또 다른 곡들이 거듭 인기몰이에 동참하면서, 그의 로큰롤 명장으로서의 명성은 보다 공고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데,
* Tutti Frutti : 이 제목은 '리틀 리처드'가 만든 의성어가 아닌, ‘모든 과일들’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로, 1938년 '슬림 갈리아드(Slim Gaillard)'와 '슬램 스튜어트(Slam Stewart)'로 이루어진 재즈 듀오, 슬림 앤 슬램(Slim And Slam)이 '여러 과일들을 뒤섞은 아이스크림의 한 가지 맛'이란 이 제목으로 제일 먼저 녹음했다. '리틀 리처드'의 곡과는 전혀 딴 판이라는 후문.
그러던 1957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순회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던 도중,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 그는 '앨리배마'의 '오크우드' 대학에 입학, 기독교 목사로서 다소 생뚱맞은(?) '팝가스펠'이라는 장르로 또 다른 활동을 이어간다.
당시 호주 투어 도중에 일어난 비행기 고장으로 화염에 휩싸인 환상을 보았다 회상하던 그였기에, 그저 한 인간으로서 살아남은 사건 직후의 깨달음이, 그를 약물과 동성애, 그리고 록 음악 등 해악을 거론하는 복음 가수로서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도록 했던 것이었다. 이로써 '리틀 리차드'는 전세계적인 포교 활동을 벌이는 유명 '가스펠' 가수로서 새로운 입지를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 '정반합'*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일까. 결국, 1962년 영국에서의 복음 투어를 화려한 복장과 다소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마친 그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에 직면, 예전 그대로의 화려한 록스타의 삶 - 이전보다 유머넘치고 안정된 모습 - 으로 회기한다.
이후, '60년 대를 지나도록 결코 식지 않는, '리틀 리차드' 만의 강렬한 대중 흡입력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만큼의 놀라운 무대를 통해,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간다.
* 정반합(正反合) : 하나의 정(正)이 반대된 반(反)을 거쳐 더 높은 단계인 합(合)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변증법적 논리 삼단계. 사상가 헤겔에 의해 정리되었다.
(다음, '하' 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