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0 17:40 (금)
[비혼라이프-⓶] 엄마의 낡은 생각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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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라이프-⓶] 엄마의 낡은 생각에게
  • 류진 칼럼리스트
  • 승인 2020.10.10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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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언스플래쉬닷컴]
[사진제공: 언스플래쉬닷컴]

싱글에게 명절은 녹록치 않다. 올해는 출장을 핑계로 방콕, 발리 등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본가로 가야했다. 도보 7분 거리에 할머니와 부모님, 동생이 사는 집이 있다. 사실 이제껏 결혼에 대한 압박을 크게 받은 적은 없다. 아주 조심스럽게 “만나는 사람은 있니?”라는 질문을 받은 적은 있지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생전 “어차피 늦었어. 조급하다고 서두르지마. 잘 살피고 만나야해.”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가족이 다른 집 어른들보다 의식이 좀 트였구나, 내가 혼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살고 있는 걸 다 알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추석 전 날, 엄마가 시한폭탄 같은 입(생각을 별로 안하고 말하는 성향이다.)을 내게 겨냥했다. “남편도 애도 없어서 힘을 뺄 데가 없으니까 그게 다 히스테리로 가는 거 아니니?” “너네 세대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엔 여자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여자로 안 봤어.” 

엄마에게 그런 말을 처음 들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화를 내야 하나? 실은 헛웃음이 났다. 엄마. 손 씻으라고 잔소리해서 미안해. (엄마는 그걸 ‘노처녀 히스테리’로 명명했다.)

부모님의 낡은 생각을 십분 이해한다. 엄마가 살아온 시대는 그랬으니까. 딸에게 저런 말을 흩뿌린게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닌 것도 안다. 엄마가 내게 하려는 말은 이거였다. “불행한 결혼만 있는 건 아니야. 좋은 사람도, 좋은 결혼 생활도 있어.” 엄마는 ‘결혼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닌’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얼마 안 남은 삼십대를 그냥 보내 버릴까봐 초초했던 거다. 

 엄마의 조급한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한동안 어떤 이혼 전문 변호사가 SNS에 남긴 글이 화제였다. “29세, 34세, 39세가 위험하다. 자신은 신중하게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기로’에 선 나이에 불안에 떠밀려서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이 많다.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좋은 결혼 상대가 아닐 수 있다.” 물론 나도 그 마음에서 자유롭진 않다. 주위의 끔찍한 결혼 생활을 보며 굳게 다지는 독신의 의지와 ‘그래도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하나?’ 그 고민 뒤에 체념이 항상 따라붙는다는 걸 깨닫고-연애와 결혼을 ‘체념’의 정서로 결정할 순 없으므로- 비혼인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쳇바퀴처럼 반복하고 있다.

예전에 취재 차 만난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누군가를 선택하거나 결혼을 추진하는 등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조급함, 불안감이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간절히 원하는 게 결국 약점이 되고, 그게 성급한 결정과 깊은 후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인 자신도 비혼으로 살고 있는 그 ‘언니’는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고 고백했다. 

내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좋은 ‘추’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 건강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책을, 말을, 인생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아마도 엄마는 그런 걸 접해본 적도, 그래서 자기 발언이 얼마나 낡은 생각인지도 모를 거다. 

엄마와의 단절(“대화가 안 통해. 그냥 말을 말자.”) 대신 선택한 건 내가 누리고 있는 멋진 언니들이 남긴 유산을 차근차근 전해주는 일이다.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스트이자 작가, 레베카 트레이스터가 책 <싱글 레이디스>에서 20세기까지 ‘결혼하거나 결혼했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되어 온 여성에 남긴 말을 ‘톡’으로 보내 줄 생각이다.  

[사진제공: 언스플래쉬닷컴]
[사진제공: 언스플래쉬닷컴]

“지난 몇 백 년 동안 이 사회는 거의 모든(노예도 아닌) 여성을, 개개인의 욕망과 야망과 환경과 선호하는 배우자 유무에 상관없이 완전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이성애적 결혼과 엄마 되기라는 단 하나의 고속도로로 밀어 넣어 버렸다.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도로가 뚫리고 노선이 생겼다. 사랑, 섹스, 동반자 관계, 부모 되기, 일, 우정 같은 요소들을 자기 식대로 조합해 각자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싱글 여성의 인생은 ‘규칙’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해방!”

 

 

(시사캐스트, SISACAST= 칼럼니스트 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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