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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라이프] 고독과 고립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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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라이프] 고독과 고립 사이
  • 류진 칼럼리스트
  • 승인 2020.10.28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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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사진 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하는 얘기가 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는 거, 와서 맛있는 거 먹고 수다 떠는 거 참 좋아. 더 좋은 건 그들이 밤이 깊으면 내 집을 떠난다는 거야.” 밤 11시 전후, 적어도 자정 이후엔 틀림없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어떤 반응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예전엔 그런 면이 나의 ‘모’인줄 알았다. 자발적으로 사람 초대 해놓고, 같이 웃고 떠들며 즐겨 놓고, 몇 시간도 안 지나서 혼자 있고 싶어하는 건 무슨 심보야? 말과 눈빛으로 핀잔을 주는 친구 앞에서 행여 그들의 기분이 상할까 봐 ‘체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변명도 부단히 했다. 

변명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진짜다. 극소수의 가족을 제외하곤 누군가와 일정 시간 이상 같이 있으면 너무 피곤하다. 한때는 건강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병원으로 달려가거나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게 만성 피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는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에서 이 고약한 저질 체력의 원인을 이렇게 밝힌다. 일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하는 말에만 집중한다면 예민한 사람들은 표정, 말투, 옷차림, 분위기, 태도 같은 것까지 신경 쓴다. 쉽게 말해 보통 사람이 메가 바이트로 받는 정보를 예민한 사람들은 기가 바이트로 받는 셈이다.

아, 내가 앞에 앉은 사람의 눈동자 굴러가는 모양, 속도, 그들이 고른 단어의 저의 같은 것을 반사 신경에 가까운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유난한 뾰족함도, 고쳐야 할 문제도 아니구나. 

물론 내 예민함을 몰랐던 건 아니다. 그게 훈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몇 년 전 좋아하는 요가 선생님이 내게 “예민해서 남보다 공감력이 뛰어나고, 그래서 타인에게 에너지를 잘 주는 성향이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을 자꾸 찾는 것”이라고 귀띔해 준 이후 의무처럼 치르던 만남과 모임을 확 줄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기꺼이 내 에너지와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친구, 지인과도 거리를 둔다.

그건 그들을 향한 내 감정이 변하거나 친밀감이 낮아져서가 아니다.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을 뿐이다. ‘너 그거 진짜야?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니야?’라고 스스로 되묻고 또 되물어도 결론은 같다. 

자발적 고립은 생각보다 매혹적이고 달콤하다. 나는 한동안 8인용 테이블 앞에 덩그러니 앉아 혼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 먹고 마감으로 바쁠 땐 머리카락이 방바닥에서 씨실과 날실로 엮여 돌아다녀도 아무 걱정 없이-누가 흉보면 어쩌지- 회피하는 자유, 내 의지로 모든 것을 산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십분 누렸다.

나 보려고 꽃 한 다발 사서 화병에 꽂고, 나 먹으려고 허브와 쌈채소를 심고, 나만 알아보는 ‘단정함’으로 집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정리하면서 내가 이런 수준의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꽤 만족스러웠다. 그러다가 불쑥 무기력이 찾아왔다.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마음은 마감이라는 강력한 동력으로 어르고 달래며 다뤘지만 딱히 이유도 없는데 친구의 연락을 외면하거나 사흘 동안 현관문을 한 번도 열지 않고 지내는 횟수가-마감이 아닌데도!!- 늘었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냅은 이런 상태를 ‘고립’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며 그저 고독할 뿐인데…… 그러다 어느새 고립된다. 당신은 만족하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새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갇힌다.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모호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혼자인 시간을 잘 보내는 것과 자신을 혼자인 상태로 가두는 것의 차이를 왜 몰랐을까? 혼자 있고 싶다고, 아직 까진 혼자인 시간이 행복하다고 떠들어 놓고 외로움을 느끼는 일이 변덕이라고 생각해서 뒤에 찾아오는 감정들을 외면했다.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 혼자였다가 불쑥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돌변하는 건 지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평화로운 고독이 어둡고 음울한 고립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혼자’와 ‘함께’라는 상태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균형을 찾는 일엔 방법도, 기준도 없다. 캐럴라인 냅은 <시간의 마지막 선물>을 쓴 작가 케럴린 하일브런이 평생 동안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유가 있는 상태’를 추구해왔으며, 60세가 넘어 시골에 작은 집을 사면서 사적인 공간이라는 필요를 채우고, 가족과 소규모의 친밀한 친구들로 교유를 충족시키며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을 달성했다고 말한다. 

결국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이 고립이 되지 않도록, 캐럴라인 냅의 표현처럼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민하게 살피는 일이다. 오늘도 혼자 있고 싶었던 나는 아무 알람도 울리지 않는 ‘방해 금지 모드’를 해제하고 주소록을 연다. 대체 누군가에게 ‘그냥’ 전화를 걸어본 적이 언제였지? 근 10년 넘게 써본 적 없는 말을 괜히 허공에 뱉으며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뭐해? 심심해서 전화했어.” 

 

(시사캐스트, SISACAST= 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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