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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라이프] 아홉수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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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라이프] 아홉수의 축복
  • 류진 칼럼리스트
  • 승인 2020.1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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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캐스트, SISACAST= 칼럼니스트 류진)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연말이 되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달력 위 숫자를 주섬주섬 짚어가며 주변 사람에게 외친다. 

“올해가 몇 일 밖에 안 남았어! 믿어져? 뭘 했다고!?” 

한 살 더 먹는 일에 별다른 감흥이 없던 시절엔 겪은 적 없는(겪을 필요가 없는) 감정이었다. 생일 케이크 위에 초를 ‘편의상 두 어 개만 꽂자’고 말하는 나이가 된 후 12월이 마감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 살았으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아직도 못한 사람, 숙제 안 한 사람, 인생을 미룬 사람처럼 쫓기는 기분. 결혼, 출산 같은 과업에 비교적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넷플릭스의 크리스마스 특집 영화를 보다 보면 도리 없이 마음이 휘청인다. 

 

실은 올해는 늦여름부터 쫓기는 기분이었다. 해가 지나면 앞자리가 바뀌는 ‘아홉수’는 사주 한 번 본적 없는 내 마음에까지 마수를 뻗었다. 스물 아홉살 땐 목을 빼고 30대를 고대했지만 마흔은… 솔직히 달갑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딱히 좋아 보이진 않는’ 결혼 생활을 보며 다지는 비혼의 의지와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길 수차례.

더 늦기 전에 승부수를 띄워야 하나? 지금은 원하지 않지만, 나중에 임신이 더 어려운 나이가 됐을 때 아이 생각이 나면 어쩌지? 이런 고민 끝엔 항상 체념, 포기 같은 정서가 따라붙는다는 걸 깨닫고, 다행히 섣부른 ‘짓’을 벌이는 불상사는 막았다. ‘불안’을 중요한 결정의 동력으로 삼을 순 없으니까. 그랬다가 크게 데인 사람들의 얘기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사진출처: 언스플래쉬닷컴]

유례없는 역병의 저주 속에서 혹독한 아홉수를 견디는 나날. ‘코로나 블루’에 대한 글을 쓰다가 우연히 숫자 ‘9’의 유래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선 결혼, 이사, 이직 등의 중요한 결정을 삼가야 하는 불길과 저주의 상징이지만 동양 철학에서 9는 사실 더 없이 좋은 숫자다.

명리학자들은 ‘9는 완성과 완벽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격변 직전의 상태. 가득 찬 후엔 비워진다.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는 뜻이다.’는 해석으로 아홉이 길조라는 의견을 뒷받침한다. 철학관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얘길 하는 건 결국 같은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신이 실제 ‘아홉’에 걸려있든 코로나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한 해’를 보낸 후 마음만 다급한 연말을 맞이한 심리적 아홉수든, 불안의 나락으로 이끄는 기로 앞에 서 있을 때가 사실은 절호의 기회라는 것, 불완전하다고 생각한 상태가 사실은 꽉 채워지기 직전의 상태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작년 이맘 때쯤 작가 장우철이 방송인 김나영에게 쓴 글, “하루하루는 그저 터프할 뿐인데 질문은 그래서 아름다웠나를 묻는 바야흐로 연말입니다. 얼마나 애쓴 한 해였는지, 얼마나 안간힘을 다했던지 세상에 말도 마, 그러고도 싶지만…”을 일기 어딘가에서 굳이 끄집어 내 눈물을 왈칵 쏟고 싶을 만큼 힘든 한 해였다.

많은 시간 동안 외롭고 쓸쓸했고 두려웠다.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회피하고 부정하며 먼 길을 돌았는데 툭, 놓고 나니 외려 마음이 다정해진다. 누군가 “올해 넌 뭘 이뤘어?” 묻는 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의 존재에 주목하고, 불완전한 자신을 관대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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