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캐스트, SISACAST= 김선우 스페셜MC 대표)
고등학교 시절 함께하는 친구들을 정말 좋아했었다. 같이 있으면, 마냥 즐겁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하는 일도 없고 감싸주는 그런 모습들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것은 내게 큰 복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고등학교 편집부 시절 글쓴이 페이지에 자주 고등학교 친구들을 언급했고 고마워했다.
하지만 12명이나 되었으니, 그 안에서는 다소 안맞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전체로 볼 땐 참 좋은 친구들인데, 개개인으로는 안맞는 부분이 충분히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그 때까지만 해도 좋은 마음을 글로만 겨우 표현해 내는 사람이었다.
편지로든, 교지에 글쓴이 페이지로든 말이다.
그런데, 몇몇 친구는 좋은 마음도 너무 크게, 싫은 마음도 너무 크게 표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마음을 고이 간직하며, 표현을 잘 못하는 내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좋을 땐 너무 잘하다가 뭔가 자신의 마음에 안들면 어떤 상황에서든 싫은 티를 내는 것이 참 부담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때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좋긴 좋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필자는 유니버시티 대회 이후로, 내가 표현하고 선한 영향력을 준다면 주변에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많음을 깨달았고, 좀 더 표현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좋으면 상대에게 칭찬을 많이 하게 되었고, 좋지 않으면 쓴소리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쓴소리의 기준은 어쩔 수 없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냐, 아니냐, 배려가 없느냐의 기준이 되었다. 그만큼 상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모두에게 좋을 수도 없고 모두에게 나쁠 수도 없다. '그래서 참 상대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실수를 했던 친구들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좋은 친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후로 정말 명확한 기준이 생겼다.
'내게 정말 따뜻한 사람이냐, 종종 전화도 하고 챙겨줄 줄 아는 사람이냐.' 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피해를 준다면 쓴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경조사에 축하 받고 싶고 집들이 하나에도 마음을 쏟아 초대하고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었다. 내가 그 사람의 결혼식에 가도 내 결혼식에는 안오는 사람, 내가 상대의 집에 놀러가도 우리집에는 한번도 안오는 사람, 내가 상대에게 마음을 쏟아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삶에는 늘 반전이 있고, 그래서 사람 마음에는 당연한 것도 없기 때문에 상대를 알기란 쉽지 않지만 나만의 기준을 세운다면, 더이상 상처받을 일도 상처 줄 일도 없지 않을까.
필자 또한 표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좋은 이야기도 싫은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지만, 고교시절 필자처럼 그런 표현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표현을 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은 떠나지 않으며, 주변에 늘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속에는 상대를 정말 얼마나 생각하느냐, 배려하느냐가 바탕이 되어야 그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왜 날 싫어하는지 의문을 갖기보다는 나는 상대에게 얼마나 배려깊은 사람이었나? 를 먼저 생각한다며 그 해답은 이미 나와있지 않을까?
[사진=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