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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가 살아있다] B0NA F1DE, 열두 점의 그림에 담긴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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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가 살아있다] B0NA F1DE, 열두 점의 그림에 담긴 비밀은?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1.07.22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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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캐스트, SISACAST= 이현주 기자)

나이지리아, 루마니아, 파라과이에서 온 세 명의 작가. 이들의 회화작품이 한 곳에 전시됐다. 

지난해 결성된 'B0NA F1DE'는 영미권과 서유럽 중심의 주류문화에서 벗어나 현대예술의 다원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모임이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단어 'bona fide'를 직역하면 '선한 믿음으로'라는 뜻이며 '진실한'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보니 파이드 소속 예술가들은 드러나 있는 현상을 넘어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모였다.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출신 오루코탄 제밀로훈(Orukotan Jemilohun)은 자신을 '역사 속 뒤안길의 궁정화가'라 칭한다. 잊혀진 자들을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의 초상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묘사된 인물들의 얼굴이 분별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는 것. 

제밀로훈은 '아프리카 예술의 익명성'이 흐릿한 초상화 시리즈를 처음 그리게 된 이유라 설명한다. 그는 "세계 곳곳의 갤러리와 박물관들이 아프리카의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정작 예술가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며 "예술시장에서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이름값으로 가치가 좌우되다 보니 아프리카에서 온 작품들은 오히려 유물 취급을 받는다"고 말하며 주류 예술가와 제3세계 예술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지적했다.

루마니아의 작가 아나톨리에 다스칼루(Anatolie Dascalu)는 다소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건축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다스칼루는 알코올 중독 치료원에서 미술 치료를 받다가 40대에 들어 붓을 잡았다. 다스칼루는 도발적인 소재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Stillborn Free>, Anatolie Dascalu, 2019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대표작 <Stillborn Free>는 사산아라는 이미지를 통해 자유에 대한 그의 갈망을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작품과 관련해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자유가 없다. 캔버스 속 아기들은 의식과 몸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다. 신체적인 한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나의 눈에 비친 가장 자유로운 존재들은 바로 사산아였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루미나아 철학자 에밀 시오랑(Emil Cioran)의 사유를 반영한다. "평범한 슬픔을 미적 언어는 기이하게 표현한다"는 시오랑의 말처럼 다스칼루의 작품에는 자유에 대한 강렬하고 기이한 갈증이 서려있다.

파라과이에서 온 예술가 아라피산두 살바티에라(Arapysandu Salvatierra)는 소리를 보고 색을 듣는 공감각자다. 인디 음악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 작가의 작품은 풍부한 색채와 자연적인 형태가 특징이다. 살바티에라는 "모든 생명은 우주가 스스로 바라보고 인식하는 창구다. 광막한 시간과 우연성을 거치면서 분자들이 일정한 형태를 이뤄 각자 하나의 생명체로서 우주를 경험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우주의 작은 기관, 작은 세포처럼 작동하며 창작한다"고 밝혔다. 

Fuga de la Tierra NO1, Arapysandu Salvatierra, 2020

살바티에라의 작품 시리즈 <지구의 푸가(Fuga de la Tierra)>는 이러한 감각실험의 일환으로, 코로나 시대에 고원과 산, 정글을 돌아다니며 듣고 느낀 지구의 소리를 화폭에 옮겨 담았다.

본 전시를 기획한 지종현 큐레이터는 세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을 꼽았다. 그는 "상이한 배경과 화풍을 갖고 있지만 세 작가에게는 비슷한 결이 있다. 제밀로훈은 현대예술계의 드러나지 않은 비밀을 지적하며 다스칼루는 인간 내면의 숨겨진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바티에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자연의 심상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전시가 기존의 영미권과 서유럽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이 비교적 낯선 문화권에서 온 작가들의 직업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덧붙였다. 

전시의 제목은 'B0NA F1DE: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다. 

여기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은 무엇일까?

-"이 전시는 완벽한 픽션입니다. 작가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지종현 기획자는 열두 점의 그림과 작가들의 사진은 모두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이미지라 설명한다. 작품을 각까이에서 살펴보면, 이미 프린트 되어있는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덧칠이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StyleGAN2'라는 생성적 적대 신경망으로 제작됐다. 이 알고리즘은 수만 점의 회화작품을 스스로 학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작업에 최적화돼 있다. 즉, 알고리즘이 붓이라면 수만 점의 명작으로 이뤄진 데이터베이스는 물감이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미술사를 총망라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다양한 화풍의 이미지를 초 단위로 만들어내며, 그 경우의 수는 40조에 육박한다.

지종현 기획자의 작업은 데이터의 범람에서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를 추려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100개 중 약 5개의 이미지 정도만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며 "이 소수의 결과물에는 여러 가지 화풍과 구도가 뒤섞여 낯익음과 낯섬이 묘하게 공존한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지종현 기획자가 한 일은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그림을 보며 '만약 사람이 이 그림을 그렸다면 어떤 배경을 가진 작가일지, 무슨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을지'를 상상했다. 몇몇 이미지는 느낌이 흡사해 같은 작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했고, 이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살펴보던 중 같은 결을 가진 이미지들을 발견하게 된다. 

-"결이 비슷한 이미지를 하데 모아, 역설계(reverse engineering)하듯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냈습니다."

데이터의 작은 오류로 얼굴이 흐릿하게 나온 그림은 '잊혀진 자들의 초상화'라는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냈으며, 화려한 색채의 추상화는 '공감각자가 자연에서 느낀 심상'이라는 주제로 풀어냈다. 

지종현 기획자는 작가마다 짧은 소개 글을 쓴 뒤, 이 내용을 자연어 처리 알고리즘 'GPT-3'에 입력했다. 이 인공지능으로 그는 가상의 작가들과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GPT-3 알고리즘은 학술적인 논문부터 시시콜콜한 댓글까지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텍스트를 학습했고, 놀랍게도 GPT-3는 실제 작가처럼 '언제부터 그림을 시작했는지', '다음 전시 계획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자세히 대답함은 물론, 스스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지종현 기획자는 각 작가의 작품관과 주제 의식을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다양한 인공지능과 방대한 데이터,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프린트된 캔버스에 질감을 입히는 인간의 손.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B0NA F1DE 프로젝트가 완성됐다.

한편 지종현 기획자는 지난 2019년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한 회화작업을 해왔으며, B0NA F1DE는 지난해 말부터 준비한 개인 프로젝트다. 공들인 전시의 기획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기계의 그림'이라는 선입견 없이, 일반적인 예술작품처럼 비춰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이제 모든 비밀이 공개됐다. 지종현 기획자는 관객들 눈 앞에 펼쳐진 작품이 기계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강조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붓질 하나하나, 그들이 캔버스 앞에서 잠겼던 생각, 붓끝을 타고 화폭에 전해진 감정. 이 모든 것이 0과 1이라는 기계의 언어로 번역된 뒤 재해석돼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나는 픽션을 쓰지 않는다. 사실을 창조할 뿐이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격언은 지종현 기획자에게 큰 영감을 줬다. 그리고 2021년 7월, B0NA F1DE는 사실이 되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전시정보

·전시명 : B0NA F1DE: 드러나지 않은 비밀
·전시장소 : 삼청동 선아트스페이스
·전시기간 : 7월 21일(수)~27일(화) 
·관람시간 : 12:00~21:00

[사진·자료제공=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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