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6주년 광복절을 맞아, 한민족으로서 끓어오르는 역사관에 심취하다가도 현 일본의 문화적 산물에 자연스레 녹아든 우리(?)를 확인할 때면 짐짓 그 포용의 경계가 궁금해진다. 위대한 현인들의 대담 그 첫 시즌의 시작.
(시사캐스트, SISACAST= 양태진 기자)
대략 흘러가는 물살에 씻기운, 국가적 차원의 넓은 아량이 대안없는 선택지에 휘둘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님, 전쟁과 압제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휘말려보지 못한 유전자들이 제 본연의 이기를 되찾았든.
그것이 뭐든 간에, 대한독립의 역사 속 근원을 역추적하다보면, 실낱 같은 두 감정에 치우칠 때가 많다. '응징과 복수'. 하지만, 이젠 그런 감정도 나름 명징한 두 빛줄기에 반사된 채로, 새로운 희망(?) 뒤로 숨어버렸다. 그 빛이 바로 '화해와 용서'인 것.
물론, 일본의 우익집단은 그런 화해를 주도하긴 커녕, 요구에 가까운 합리화를 통해 그들만의 과거를 가치로 승화시켜왔다. 그러나 이들이 일본 전체를 대변할 순 없을 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우리의 생생한 역사는 이제 전세계인들과 함께, 일본인 대부분의 가슴에도 분개한 꽃으로서 만개해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왜곡의 역사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끝없이 외치면서도, 일본식 대표 식메뉴인 '스시'를 비롯, 잘 빠진 '렉서스'의 승차감에 두 눈 질끈 감은 채 반해 마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가상대담 | On Air]
사회자 : 그렇다면, 일본 문화의 유입에 있어 지난 역사의식에 고취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략 어떤 입장을 고수해야 할까요? 괴테님?
괴테 : 그렇다고 매해 '광복절'로 독립의 역사를 기리는 한국인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분명 일본과의 문화 등 여러 차원에서의 교류는 시간의 연속선 상에서 자연스레 돌출된 이끼와도 같은 모습을 형성해 간 것일 뿐이니까요.
"역사 의식에 도취되는 건, 성장과 반하는 것."
무엇보다 예전 당시에 외쳐대던 그 대한독립의 기치 만큼은 한껏 드높여지고 필히 되새겨져야 할 것이기에,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필시 여기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또한 또 하나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 모든 사람은 존재하기만을 원할 뿐, 그 누구도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에드먼드 버크 : 글쎄요. 전 '괴테'의 말을 일부 수용하더라도 전체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장은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오는 것이지만, 그만큼 새로운 희열을 낳음에 있어 모든 이들의 가치로운 판단 내 출발점이기도 하니까 말이죠. 성장의 비용은 침체의 비용보다 훨씬 적게 들기 마련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화해를 향한 또 하나의 제스처."
그러한 성장을 위해 대한민국의 독립 정신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 것일 뿐,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들로부터 '용서를 위한 화해'의 제스추어를 이끌어내기 위한 어느 정도의 단계별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엔 분명 악행을 저질렀음에, 일본인들 또한 '인정의 역사'에서 '뉘우침의 역사'로 접어든 것일테구요.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길은 착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처럼, 적어도 한국인들은 일부 대립적인 상황의 연속 선상에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랭크 시나트라 : 문제는 화해를 주도하면서도 용서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그 부분 만큼은 똑똑히 놓치지 않을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나서, 미래의 현실 또한 제대로 목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진정한 용서란 스스로 뉘우칠 수 있도록 일정 부분의 여지를 주는 것."
일본인들의 과거 만행이, 그들 후손 스스로가 제 아무리 대신 죄를 뉘우친다고 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란 것에 모두가 동의를 한다면, 용서 해야 할 한국인들 또한 일본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허물을 묻어줄 특별한 구덩이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해당 죄수가 석방되고도 그 죄수가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할 테니까요. 대한민국이 현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는 것 또한 이러한 부분의 일환이 아닐까 합니다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여러 정권의 부침 속에 대한민국은 일본과의 국가적 교류 체결에 심히 앞장 서 왔습니다. 국민과의 합의를 충분히 이끌어냈는지는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의 갈래길에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면, 미덕과 악덕 사이에 바로 드러날 진리란 없음을 강조하고 싶네요. 하지만 결단코 선함이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투자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를 상기하고 무엇이 선한 행동일지 올바른 미래를 스스로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한 문화적 교류라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유일한 투자가 될 수 있을 것.
토마스 제퍼슨 : 제가 볼 땐, 과거 심각한 과오를 저지른 존재는 항시 주변인들로부터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선 딱히 신뢰할 수 없는 역사적 행동을 배경삼아 일본을 때마다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일테구요.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하루라도 빨리 꿈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신뢰의 구축은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면 안될 일입니다. 불신으로 화를 기다리기 보단, 어떻게든 신뢰 속에서 화합을 꿈꾸는 것이 - 한때 한인 유학생이 철로에서 일본인을 구해 영웅이 된 사례 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 - 보다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전 과거의 역사보다는 미래의 꿈을 좋아한답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말이죠.
안중근 : 앞서 '토마스' 전 미대통령의 말씀과 같은 취지로 볼 때, 우리의 한류 문화가 일본 내에 스며든 것은 이전 한글과 그 밖의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식 만행을 기억할 때, 다소 평화적인 형태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임엔 틀림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것을 잊지않는 가운데에서도 특히, 대한독립의 정신이 훼손될 소지가 있다면 말입니다. 또한 개개인은 스스로의 영달 대신 누군가의 존속을 위해 희생할 수도 있다지만, 국가라는 군집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그 자체가 오로지 존속되어야만 할 대상이기에 그러한 것이지요.
한 인물, 한 영웅의 위대함만으론 결코 상대 나라의 모든 입장을 대변할 수 없는 만큼, 그저 상대 국가란 양립 불가능한 경우, 그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희생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서울대 김영민 교수*님께서 철저히 분석해 놓으신, 광복의 '광(光)'의 의미가 비단 빛광으로 그치는 말이 아닌, '옛 도읍을 영예롭게 회복한다'는, 다시 말해, 영예롭게 무엇인가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우리는 광복을 염원하였습니다.
그러함으로 이젠 그 영예를 되찾아야만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대립과 고난의 역사가 아닌, 화해와 존중의 영예로서 모두의 근본이 확립된 바탕 내에서 화합이 도모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천국에 와서도 마땅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고, 대한 독립의 함성이 천국까지 들려왔던 그 때, 충분히 춤 추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서기 위해 서로의 기운을 북돋아야 할 것이요, 이젠 서로의 이해 관계 보다는 각자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본바탕 위에서 애국의 기치를 근본으로 삼아 세계인으로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영민 교수 : 하버드 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 오며, 여러 저서와 함께 칼럼에 또한 연구 내용 등을 기고했다.
※ 총 참여 인원 6명('괴테', '에드먼드 버크', '프랭크 시나트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토마스 제퍼슨', '안중근')의 굵은 글씨체가 그들이 직접 언급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