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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궁궐중 가장많이 수난 겪은 ‘비운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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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궁궐중 가장많이 수난 겪은 ‘비운의 궁궐’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1.15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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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둘러보기

광해군 8년에 인조 아버지 살던곳에 세워진 궁궐
일제때 학교건물로 용도 변경돼 이곳저곳 파헤쳐져

홍화문 바닥등 흙이 아닌 시멘트로 덧칠돼 아쉬움
태녕전등 고풍스런 맛 없어 ‘퇴색한 왕궁’ 같기도

경희궁은 광해군 8년(1616)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이 살던 새문동 집터에 세워진 궁궐이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했다가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은 경복궁을 북궐(北闕), 창덕궁을 동궐(東闕)이라 했듯이 서궐(西闕)이라고 했으며,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이라고도 불렀다.

경희궁에는 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는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해 융복전(隆福殿), 회상전(會詳殿), 집경당(集慶堂), 흥정당(興政堂), 정시각(正始閣), 사현각(思賢閣), 흥화문(興化門) 등의 건물들과 다른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지만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지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부터 강제 철거 또는 이전되기 시작해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됐다.

광복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현대건설이 부지를 사들여 사용했고, 이를 다시 서울시가 인수해 1985년 사적지로 지정, 1988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경희궁이 복원되기 시작한 지도 20년이나 됐지만 경희궁은 서울에 있는 궁궐 중에서 가장 계획적으로 파괴된 비운의 궁궐이다. 일제가 한일합방 전부터 일본 관리들의 자식들을 교육시킬 학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경희궁을 파괴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도 학교 건물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중, 고등학교가 경희궁에서 개교해 30년 이상 학교 부지로 사용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다.

현재는 숭정전과 회상전의 섬돌과 축대, 계단 등이 일부 남아있는 터전위에 숭전전, 자정전(資政殿)·태령전(泰寧殿) 등이 복원돼 있다. 특히 숭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봉황무늬 조각과 계단 옆의 구름무늬 조각은 솜씨가 뛰어나다.

흥화문은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이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이후 1915년 도로를 내면서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으며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이 됐다.
 
광복 후 이 자리가 영빈관(迎賓館)으로 바뀌면서 영빈관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는 이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사업을 시행하면서 현 위치로 이전됐다. 지금의 자리도 제자리가 아니니 흥화문은 참 운명이 기구하다.

흥화문은 바닥은 물론 그 주위가 흙이 아닌 시멘트로 덧칠이 돼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파괴되기 전의 경희궁은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 금천(조선 시대 왕궁에는 정전에 이르기 전 하천이 흐르도록 설계됐는데 그 하천을 금천이라 한다.)의 다리를 건너고 60여 미터를 오다가 직각으로 꺾이면서 정전인 숭전전을 향하게 돼 있었다.

지금은 경희궁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면서 흥화문을 지나자마자 숭정문이 눈에 들어온다. 궁궐로서의 권위가 손상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흥화문이 여느 궁궐의 정문과 달리 2층이 아니라 단층인 까닭은 경희궁이 정식 왕궁이 아닌 이궁(離宮)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이신(李伸)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경희궁의 금천교는 깨끗한 석재로 잘 다듬어져 옛스런 맛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옛 모습과 위치에 따라 복원됐기 때문이다.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복원된 것은 반가운 일인제 아쉽게도 다리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다리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면 석재의 색깔이 다른 부분이 보이는데 옛 다리의 석재를 사용한 것이다. 아쉬운 대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어 위안을 얻는다.

금천의 난간 기둥에는 돌짐승이 서 있다. 언뜻 보면 창덕궁의 금천교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조각이 섬세하지 못하고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경희궁과 관련된 건물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전각이 숭정전이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서 국왕과 신하들이 조회를 하던 법전이다. 순조 29년의 큰 불에 화마를 입지 않아 광해군 10년에 완공된 건물의 자태를 남기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원래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구내로 옮겨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경희궁에 있는 것은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경희궁을 복원할 당시 동국대 내 정각원을 옮기려 했지만 나무와 석재들이 노후해 옮기지 못했다. 경희궁의 숭정전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17세기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숭정전의 앞뜰에는 박석이 깔려 있고 품계석이 양쪽으로 놓여 있다. 품계석이 있어 숭정전의 정전다운 면모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숭정전의 재밌는 특징은 주위 행각을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지었다는 것이다.

북쪽 행각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한 층씩 높아지고 동서 행각은 서쪽으로 갈수록 한 층씩 높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어 동쪽에서 서쪽, 서쪽에서 북쪽으로 계속 한 층씩 높아지는 연속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숭정전의 아래층 계단의 답도와 서수(계단에 새겨지는 짐승의 모양) 등은 1985년 경희궁 터 발굴 당시 발견된 것을 그대로 사용해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앞뜰에 깔려 있는 박석(마당에 깔리는 돌)은 최근에 복원한 것인데도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그것보다 자연스럽게 보여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경희궁은 서울의 궁궐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고 한적한 곳이다. 그래서 여러 궁궐을 둘러 본 사람들의 기억에서 가장 쉽게 잊혀 진다고들 한다. 그런 경희궁 중에서도 가장 한적한 곳이 태녕전일 것이다.

태녕전의 정문인 태녕문은 숭정문의 서쪽으로 이동해 작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마주치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궁궐의 전통 건축 양식을 벗어나 사당의 정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궁궐의 관리를 위해 필요했겠지만 태녕문이 잠겨 있어 태녕전으로 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숨통이 막혀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을 더한다. 태녕전으로 가려면 자정전 옆으로 해서 돌아야 한다.

태녕전 역시 최근의 복원사업을 통해 새롭게 지어져서 고풍스런 느낌이 부족하다. 태녕전 뒤로는 계단처럼 담장이 둘러쳐 있어 전체적으로 규모 있어 보인다. 태녕전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선대왕의 어진(왕의 초상화)이나 유품 등을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녕전은 2단의 월대(건물을 떠받치는 돌 받침) 위에 지어졌지만 2층 월대는 아주 작은 공간만 있을 정도로 미미하며 월대를 오르는 계단에는 아무 문양이나 무늬가 없어 간결하고 소박하다.

경희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떤 건물도 아닌 서암(瑞巖)과 암천(巖泉)이다. 태녕전 뒤 언덕에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서암이다. 원래 이름은 왕기가 서려있다고 해서 왕암이었다고 전한다. 바위 아래로는 샘이 솟는 암천이 있고 동그랗게 홈을 파서 조금씩 바위 아래 수로로 흘려보내고 있다. 서암과 암천은 낭만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퇴색한 왕궁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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