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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에 옮겨쓴 부처님 말씀 ‘패업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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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에 옮겨쓴 부처님 말씀 ‘패업경’
  • 하정민 기자
  • 승인 2008.01.18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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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 팔리어로 기록된 불교경전 ‘패엽경’
종이없는 시절 인도 다라수잎에 경전 기록
계율-경전-논장으로 분리 3개 광주리 보관
무려 2,000년이상 된 진귀본 원본경전 많아

대장경은 부처님 말씀 널리 반포위해 간행
현존 최고 대장경판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여러차례 교열 거친 가장 정확한 것 평가
불법 부흥-후손에 경전남기려 석경 만들어
중국은 멸시 대비 산속에 석각대장경 건립도

부처님 말씀인 불교경전은 어떤 경로로 전해져 왔을까, 문명이 발달하기 전,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우리 조상들은 어떤 방법으로 불경을 이어왔을 까가 자못 궁금하다.

이러한 불경을 최초로 기록한 것은 패다라(貝多羅: Pattra, Patra)라는 나뭇잎에 옮겨 쓴 패엽경(貝葉經)을 보면 우리는 불교 전래의 유구성을 알 수 있다.

B.C. 3천년 경 인더스강 유역에 형성된 인도문명 지역에서는 주로 자작나무껍질과 구리판, 천, 짐승 가죽을 기록재료로 이용하였다. 특히 북인도지역에서는 주로 펜을 이용해 기록하였고, 남인도 지역에서는 첨필(尖筆)로 새긴 후, 잉크를 덧발라 기록하였다.
 
패다라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인 초기의 불교 결집경전(結集經典)으로, 범어나 팔리어로 기록된 불교경전을 패엽경이라 한다. 무엇보다 패엽경은 유사 이래 어느 종교에도 없는 원본경전으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힌두어로 쓰여 있는 무려 2천년 이상 된 진귀본 들이다.

부처님 말씀 최초로 기록, 패엽경

부처님의 설법과 교화 내용은 그의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였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은 부처님의 교법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각자가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聞), 즉‘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라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모아서 결집(結集)하였다.

다시 말하면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에서 석가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迦葉)을 상좌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經), 율(律), 2장(藏)을 정리하여 다라수(多羅樹) 잎에 새긴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로 만들게 된 기록이 패엽경이다. 패엽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던 해(BC 544)였다.

패엽경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인도에서 다라수 잎에 경전을 기록했던 것이다. 패엽경은 주로 남방 계통의 팔리어 불경으로 야자수 잎에 새긴 경우를 말한다.

패다라란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새기는 데 쓰인 나뭇잎을 말하는 데, 흔히 다라수 잎이 많이 쓰였기에 붙여진 말이다. 다라수는 종려나무와 비슷하고, 그 잎은 바탕이 곱고 빽빽하고 길다.

전문가들조차 패엽경이 특정한 어떤 식물의 잎으로 생각하지만, ‘패다라’(Pattra)는 단지 ‘잎’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패엽경은 주로 인도 남부나 스리랑카 등지에서 종이를 대신해 야자수 잎에 사경한 것을 말한다.

야자수 잎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 철필로 경문을 긁은 다음 새겨진 홈에 잉크를 붓고 닦아낸다. 이것을 건조한 다음 양쪽에 구멍을 내어 끈으로 묶어 경전을 만들어 낸다.
 
글 쓰는 데 사용하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자획을 만들고 먹을 넣는다. 그 크기는 보통, 너비 6.6 cm (2치), 길이 66cm(2자) 정도로 하며 2군데에 구멍을 뚫어 실로 몇 십 장씩 꿰어 묶어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엽경은 각각 계율, 경전, 논장으로 나누어져서 3개의 광주리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완전한 전승이라고 알려진 팔리삼장의 이름이 Tipitaka, 즉 3개의 광주리란 뜻을 담고 있다.

대장경, 경장·율장·논장으로 구성돼

불교 경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문자화한 것으로 불경, 경문, 경이라고도 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크게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으로 삼장(三臧)으로 구성되고 있다.

경장은 부처님의 설법과 교화 내용을 담은 경을 적은 것이고, 율장은 불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조항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놓은 율을 담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장은 경장과 율장에 대한 해설서, 즉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을 달아 놓은 것이다. 삼장이란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혹은 빨리(Pali)어로 된 뜨리삐따까(Pitaka)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장경의 시초는 앞서 언급한 패엽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문화권에서는 크고 작은 대장경이 산발적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한문 문화권에서는 중국에서 북송 칙판(勅版)대장경이 최초로 편찬되었다. 이 밖에도 몽골 대장경, 티벳 대장경, 서하판 대장경 등이 각지에서 편찬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초조고려대장경, 교장, 팔만대장경 등이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편찬되었다.

최초의 사경, 패엽경으로 밝혀져

사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율인 율장과 경장, 율장을 조직적으로 논술한 논장까지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경이란 말은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 곧 대장경, 일체경(一切經)이라 통칭되는 불교성전(佛敎聖典)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초기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손으로 직접 경전을 쓰는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이와 같이 불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써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베껴 쓴 필사(筆寫) 경전은 완성된 후 그것을 모본(模本)으로 다시 옮겨 쓰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불교 성전은 원래 고대 인도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되었다. 사경의 시작은 부처님의 금구(金口)로부터 송출(誦出)한 불(佛)의 언어를 부처님의 제자들이 범어로 기록했던 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래를 목적으로 종려 껍질에 베껴 쓴 패엽경을 최초의 사경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로 전해진 북방 불교권에서는 범어 성전이 중국어나 서장어로 번역되어 유통되어 왔다. 그리고 남방 불교권은 이곳의 언어인 팔리(Pali)어로 표기되어 인도 남단의 세일론, 미얀마, 타일랜드 등에 전해져 이른바 남방불교는 모두 팔리어 성전을 사용하여 왔다.
 
이렇게 전해진 범어와 팔리어 성전은 초기에 패다라라는 나무의 잎에 필사한 것으로 패엽경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패엽경을 보기 힘들다. 일부에서는 국립중앙도서관과 봉은사에 3질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한역된 불교성전이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삼국시대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이라 모두 필사의 방법으로 베끼지 않으면 유통될 수 없었던 시기였다.

팔만대장경, 몽골족 침략 물리치고자 간행해

경전은 필사경과 목판경이 유명하고, 흔치 않지만 석경이 있다. 목판경으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대표격이다. 석경으로는 세계적으로 중국 석교 석경(6세기 중엽), 방산 석경, 그리고 우리나라의 화엄 석경을 꼽고 있다.

고려 대장경이라 말하는 것은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 대장경을 가리킨다. 해인사 대장경을 고려 대장경으로 통칭하는 것은 고려 대장경 중 그것만이 현재 해인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촉판 대장경(蜀版大藏經) 이래 완벽한 대장경이 간행된 것은 고려의 현종 때였다. 이것을 초조 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하는데, 나라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려는 기원의 소산이었다.

해인사 대장경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족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간행되었다. 고종 때인 1237년에 착수하여 1251년 완성했다. 소위 ‘ 팔만 대장경’이라 하듯이 완성 당시 경판의 총수는 8만 1,137매였고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은 8만 1,258매에 이르며, 1,516종의 문헌 6,815권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는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었던 것이 해인사로 옮겨져 해인사 대장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으나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해인사대장경은 첫째, 현존하는 대장경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여러 차례의 교열을 거친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법 멸시 대비, 중국 방산 운거사 석경 건립해

불교의 석경은 말법사상(末法思想)에 기초하고 있다. 즉 불법과 경전이 멸절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불법을 부흥시키고 올바른 경전을 남길 목적으로 깊은 산 속의 여러 석실(石室)에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졌다.

풍욕석경(風石經)·북향당산석경(北響堂山石經)·방산 석경(房山 石經)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주로 벽면이나 비판(碑版)에 새긴 것이다. 이외에 6각과 8각의 석주(石柱)에 〈불정존승다라니경 佛頂尊勝陀羅尼經〉·〈반야심경 般若心經〉 등을 새긴 ‘석당’(石幢)이 당(唐)·요(遼)·금(金)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다. 이들 역시 석경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석경으로는 세계적으로 중국 석교 석경(6세기 중엽), 방산 석경, 그리고 우리나라의 화엄석경을 꼽고 있다. 화엄석경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화엄의 세계를 돌에 새긴 국내 유일의 대규모 석경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화엄석경은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문무왕 10년(670년) 화엄사 중창시에 장육적을 건립하면서 네 벽을 흙으로 바르지 않고 돌에 화엄경을 새겨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파손된 채 방치된 화엄석경은 1912년 일본이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당시 석경편이 완전하고, 뛰어난 것들은 일본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법 멸시를 대비한 석각 대장경이 있다. 중국 북경 남서쪽에 위치한 산악지대에는 불교유적이 점재하고 있는데, 그 외에 백대산(白帶山) 기슭 계곡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는 장인천(杖引泉) 상류의 서쪽에 석경사라 통칭되는 운거사가 있다.

이는 서곡사 혹은 서역사라고도 하는데 동쪽으로 향한 천왕 비로 석가 약사 미타 대비의 제전(祭殿) 이산 경사면에 계단모양으로 열을 이루고 있다. 그 남북에 11층 8면의 대전찹과 2층 8면 위에 인도의 스투파를 얹어놓은 것 같은 대합(나한탑 북탑)이 위치하고 있는데,

중일전쟁 때 포화로 파괴되어 북탑과 석조의 잔해만을 남기고 있다. 이 운거사 남탑과 그 북동 봉우리인 석경산(높이 450미터) 아래 위치한 9개의 경동(經洞)에는 막대한 불교경전의 일대 총서인 대장경의 석각이 채워져 있다.
 
현재 중국불교협회가 펴낸 「방산 운거사 석경」에 의하면, 석경산 아래 9개의 경동에서 4,620석, 남탑 지하에 10,061석을 발굴하였고, 그 외 나머지 경 420석, 동굴 바깥에서 각종 비명(碑銘) 82석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방산의 석경은 비판(碑版) 양면에 경문을 새긴 점이 특징이다.

중국정부는 그동안 발굴한 석경 대장경을 지난 1999년 9월 9일 아침 9시 9분 9초에 매장하였다. 2000년 후에 재 발굴하기로 하고 다시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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