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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의 ‘독립염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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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의 ‘독립염원 목소리’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1.19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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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들여다보기…

격동의 파란만장 역사속
시대의 구심점 역할 톡톡

김세연이 설계 日이 시공
조선 제1갑부 최창학 소유
처음에 ‘죽첨장’ 이름 쓰다
김구 거처하며 ‘경교장’으로
현재는 강북삼성병원이 사용

중화민국 대사관저로도 사용
한국전쟁땐 美 특수부대 주둔
김구선생 안두희에 암살당한곳

경교장(京橋莊)에는 한국 사회에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 ‘제1의 갑부’두 사람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경교장을 지은 일제 때의 광산왕 최창학과 현재 경교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다.

경교장의 법적인 소유자는 (주)삼성생명이며 강북 삼성병원이 원무과, 의사 휴게실 등으로 사용 중에 있다. 최창학과 이건희는 한국 최대의 재벌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말로가 평탄치 않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경교장은 1936년 착공해 3년만인 39년 준공했다. 설계는 일제시대 조선인 최고의 건축가로 알려진 김세연이 담당했다. 경교장은 금광을 경영하던 최창학의 사저로 사용되다 해방 직후 귀국한 김구의 사저 겸 집무실로 제공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경교장의 본래 이름은 죽첨장이었는데 김구가 일본식 이름이 싫다며 인근에 있던 다리인 경구교(京口橋)에서 이름을 따 경교장이라 부르게 됐다.

최창학은 일제 때 군수 물자를 일본에 제공하는 등 친일행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구성돼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귀국한 김구 일행을 찾아가 “나는 당신들이 밖에 나가서 고생했기 때문에 그 위로 차 왔고, 또한 내 좋은 별장을 주겠습니다”라며 경교장을 김구에게 헌납했던 것이다.

최창학은 김구에게 경교장을 헌납한 후 결국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김구 선생한테 쫓아갔으니 죄인이 아니다, 면제 받았다, 김구선생님도 나를 친일파로 안 본다”면서 반민특위에 가서도 큰소리를 친 것으로 전해진다.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출신인 최창학은 1929년 8월 구성군 관서면 소재 금, 은 광산 87만1750평에 광업권을 설정하면서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창설했다. 그 이후 1938년, 그는 자기 소유의 광산을 일본광업주식회사(日本鑛業株式會社)에 650만 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했다.

또한, 그는 평북 운산(雲山) 일대에서 광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연전(연세대의 전신)에 130만 원에 광산을 팔아서 방응모(方應謀, 조선일보 창업자), 원윤수(元胤洙) 등과 함께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38년 최창학이 평북 구성을 떠나 전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자 구성군과 평북 세입이 감소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당시 최창학은 구성면비 1500원, 학교 조합비(學校組合費) 4000원, 평북도비(平北道費) 2000원 등 총 7500원을 납부하고 있었으며, 혼자 학교 조합비 3분의 1을 부담하고 있었다.

1937년 조선중공업(현 한진중공업)의 조선인 주주로 참여해 1천 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대자본가로 성장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조선미술학교 설립 때 1백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일제 시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오산학교(현 오산중학교) 4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보광동 신교사(新校舍) 건립 건축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1938년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최창학은 금광으로 번 막대한 돈을 주로 교육 사업에 투자하면서 거부로서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로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조선 대자본가로 성장하던 최창학은 서울로 이사하면서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고 ‘황국신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종 친일 단체 임원과 ‘대동아전쟁’을 지원하고자 국방 헌금 납부 등에 앞장섰다.

최창학은 1938년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 경기도연합회 지부, 서대문지부 평의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항일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맹활약했다.

1938년 4월 친일신문 매일신보사 주주발기인과 상무취제역으로 활동하고,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1939년 2월 11일 경성부 육군지원자 후원회에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박흥식 등과 함께 이사로 선출됐다.

최창학이 서울로 이사한 후 벌인 일련의 활동은 전시총동원의 통제 강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친일 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친일 친목 단체 구일회(九日會) 회원으로, 1939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위원회 및 간사회 평의원까지 친일활동 최전선에 서있었다.

1941년 9월 7일 최창학은 임전대책협의회 강연회에 참석하고 ‘총후봉공(銃後奉公, 일제 말 전시체제 강화를 위한 선전 구호)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면서 채권 가두 유격대원(채권을 국민들에게 팔아 전시 자금으로 동원했음)으로 활동했다.

최창학은 정총 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요구하는 매일 아침 궁성요배(宮城遙拜), 신사참배(神社參拜) 장려, 선조(祖先)의 제사 장려, 가능한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국기의 존중 게양의 장려, 일본어 생활 장려, 비상시 국민생활기준양식의 실행, 국산품 애용, 철저한 소비 절약과 저금 장려, 국책 응모(國債應募) 권장, 생산 증가와 군수품 공출 운동에 앞장섰다.

이 뿐만 아니라 근로보국대의 활약 강화, 1일 1시간 이상 근로 증가의 장려, 농산어촌 갱생 5개년 계획의 완전 실행, 전 가정 근로, 군인의 환송연, 부상병의 위문, 출정 군인 및 순국자 유가족의 위문과 가업 보조, 가능한 매일 순국자 영령 묵도, 유언비어 및 간첩 경계, 방공방첩의 협력 등을 직접 참여하거나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 지탄을 받게 된 일부 친일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요됐다’고 변명들을 늘어놓았지만, 천만장자로 칭송 받았던 최창학은 강요에 의한 친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뚜렷한 증거로,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최창학의 친일 행적들이 있다.

1940년 6월 3일 시국운동비 5만 원, 애국비 4만 원, 정총 조선기금 10만 원을 내놓으면서 ‘대동아전쟁’을 직접 지원하게 된다. 1942년 9월 6일 남방군인용 부채 천 개를 헌납하기도 했다. 최창학이 자신의 부를 자발적으로 친일 행적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친일협력자 최창학은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 인계이사로 참여하고, 해방 이후 일본인 광산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한다고 하면서 부를 축적해 갔다.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돼 명성을 얻었다. 최창학이 대표적 친일인사로 활동했지만 해방 후에도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으면서 그도 단죄 받지 않은 것이다.

반민 특위가 구성되면서 임정 요인들에 의해 최창학은 숙청 대상자로 지목됐고 처단의 위기에 처했지만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면서 최창학도 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창학은 해방 후 정국을 잘못 진단해 김구계에 줄을 댔지만 이승만이 집권한 데다 김구가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좁혀졌다.

거기다 직접적으로는 농지개혁법의 시행으로 토지 자본이 몰락했고 한국전쟁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최창학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최창학은 전성기에 아무리 돈을 써도 돈이 줄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현금을 소유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최창학과 이건희가 함께 연상되는 것은 경교장에 얽힌 사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건희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도 ‘몰락’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자식들에게 무리하게 부를 물려주려다가 재판이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최근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삼성과 이건희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돈은 잘 벌어야 하는 것만큼 잘 쓰는 것도 중요함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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