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9:21 (목)
한국근대 ‘혼란의 정치사’ 녹아있는 유서깊은 곳
상태바
한국근대 ‘혼란의 정치사’ 녹아있는 유서깊은 곳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1.22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운현궁 둘러보기

고종 12살까지 살았던 잠저
흥선대원군 10여년간 집정한
조선말 정치 중심지로 유명

창덕궁-경북궁 중간에 위치
4개의 대문있던 궁궐의 모습
섬세-아름다운 노안당 볼만
대원군 개혁숨결 살아있는곳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군(興善君) 이하응(李昰應)의 저택이다. 김동인의 장편 ‘운현궁의 봄’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고종이 태어나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종의 잠저는 따로 있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 일반 상류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역이 크게 넓혀지고 건물들도 새로 더 들어서 궁궐다운 면모를 지니게 됐다.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간 집정하는 동안은 정치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운현궁 동북쪽 뒤에 있었는데, 1966년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9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됐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던 것이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고종이 즉위(1863. 12. 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시작됐고, 9개월 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이 준공됐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해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운현궁이 준공됐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했다고 전한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을 거듭하면서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해 마치 궁궐처럼 엄숙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舊TBC동양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추측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했다.

노락당은 궁궐의 건물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노락당의 높이를 과장한 것이 아니라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에 대한 비유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음은 물론이다. 운현궁이 왕궁을 대신하는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됐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됐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됐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돼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했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돼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는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로당은 노락당 옆에 있는 안채로서 구조가 ‘口’자형으로 돼 있고 그 내부 가운데에 정원이 있는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었다.

최초의 이로당 주인은 부대부인 민씨(1819-1898)였고, 다음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였다. 그가 57년간 운현궁의 안주인으로 있다가 대원군의 증손 이우(李 )의 부인 박찬주씨가 잠시 이로당 살림을 맡았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노락당 못지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던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정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기초만 남아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는 있다.

이외에 운현궁에는 후에 일본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1870-1917)을 회유하기 위해 1910년에 지어 줬다는 양관(洋館)이 덕성여대 정문 쪽에 있다. 이 역시 명분과 실제 목적은 달랐다. 일본은 양관에 순검 40명을 파견, 주둔시켰는데, 이는 이준용 감시가 주목적이었다.

운현궁의 규모와 구조가 이와 같이 왕궁을 연상케 할 만큼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은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가 하야한 후 고종 18년(1882) 청의 보정부(保定府)에 피납돼 있는 3년 동안 운현궁의 재정은 매우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청에 납치돼 있는 동안 그 곳의 조종대신들에게 은(銀)을 뇌물로 바치느라 거의 다 썼던 것이다. 이후부터 운현궁의 위용도 퇴락해졌으며 대원군이 타계한 다음은 그 유지 관리조차 매우 어려워졌다.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1845-1912)이 관리할 때 고종이 내탕금 270만 냥과 쌀 370석을 하사해 운현궁을 수리하고 밀렸던 빚을 갚게 했다는 기록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놓고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벌어졌고 같은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의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됐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됐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운현궁을 한국근대사의 유적으로 보존할 권리와 책임을 서울시에서 지게 됐다. 한국근대사의 여명기에 정치능력이 가장 탁월했던 대원군의 정권창출 근거지가 운현궁이었기에 운현궁은 문화재로서 보존할 의의가 분명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