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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문화유산 ‘고풍美 넘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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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문화유산 ‘고풍美 넘치는 곳’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1.28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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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최순우 고택’ 둘러보기

한국의 미 발전위해 평생바친 미술사학자의 옛집
저작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관심으로 유명해져
뒷편에 차 마실수있는 공간 ‘한가로운 맛’ 물씬

붉은벽돌 담장서 ‘한국적 미’ 배어나오고
간장·고추장 담긴 항아리 “옛생각 절로”
유홍준씨 “전통미 일깨우는 최고의 가옥”

서울에는 가끔 ‘이런 곳이 서울에도 있었나’싶은 곳들이 있다. 온통 성냥갑을 세워 놓은 듯한 아파트 촌이 있는가 하면 분명 서울인데도 농사를 짓는 곳도 있다.

성북동도 매우 독특한 곳이다. 성북동은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에서 우리 전통 한옥이 보존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북동은 옛부터 양반들이 살던 동네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기업체 총수들의 집이 몰려 있는 곳이 성북동이기도 하다.

산업화가 진행된 60년대 이후 몰라보게 달라진 서울에서 그나마 단층 형태의 가옥 형태를 띤 옛 풍취가 조금 남아 있는 곳, 성북동은 그래서 찾아 가고 싶은 곳이다.

성북동으로 가는 길에는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아파트 단지가 없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게 간송미술관과 길상사도 성북동에 자리 잡고 있다.

삶의 안식처가 돼야 할 집이 크기와 값으로 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상품이 돼 버린 것 같다. 아파트는 집으로서의 역할과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만족시켜 준다. 편의와 실리의 논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주거 대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는 한국적 주거 형태는 아니다. 한국인들이 시골의 한옥 집을 볼 때 고향의 정취와 포근함을 느끼는 이유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가끔씩 보이는 단층 집 담 너머에 쇠창살이 눈에 거슬려도, 아직 골목을 끼고 집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 보기 드문 광경이 돼 반가운 마음이 든다.

삼선교에서 버스를 내려 성북천을 끼고 조금 더 성북동 안으로 길을 걸으면 파출소 앞 화단에 심어진 느티나무가 시선을 끈다. 나무 앞에 소개글을 담은 간판이 서 있어서 예사 나무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느티나무를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지나는 길에 기념으로 식수했다는 간판이 붙은 것을 보니 이 나무는 문화재 반열에 올라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느티나무에서 조금 지나 골목길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혜곡 최순우의 고택이 나온다.

최순우는 1916년 개성에서 출생했다. 조선조에 화담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 삼절에 비한다면, 최순우 선생은 국내 고고미술사학계의 황수영(동국대), 진홍섭(이화여대)과 함께 개성삼걸로 회자된다.

최순우는 1935년 개성송도 부립 박물관을 시작으로 박물관 학예관 10년, 미술과장 20년, 수석 학예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살았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장 시절 1976년부터 1984년에 일본, 미국, 유럽에서 “한국미술 5천 년 전”을 주관해 한국미술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일본에서의 “한국미술 5천 년 전”은 일본학자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우월감과 편견을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재일 한국인에게 커다란 민족적 자긍심을 주는 계기를 심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순우는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한 전시회의 기획자로서 뿐만 아니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밀리언 셀러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는 지금의 최순우 고택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곳곳에 최순우의 미감(美感)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원주인이 1925년에 땅을 구입해 지금의 형태로 지은 것으로 서울 경기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같채의 형태를 띤 이른바 ‘ㅁ’자 형태의 한옥이다. ‘ㅁ’자 가운데의 조그만 마당에는 한 켠에 우물, 몇 그루의 나무들과 돌확이 놓여있다.

예전에는 마당 오른편에 커다란 감나무가 심어져 해걸이로 감이 열리고는 했는데 지금은 감나무 대신 대나무가 구석 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대나무 숲이 접해 있는 담장 모퉁이에는 작은 문신석 한 쌍이 서 있어 댓잎이 흔들릴 때면 옛 선현들의 기상이 느껴진다.

최순우가 집을 구입하기 전 이 집의 뒷 편은 채소를 심어놓은 텃밭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와 산수유가 심어져 옛 텃밭을 대신하고 옛 석물이 귀퉁이에 서있어 예전에 텃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뒷 편 한 구석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져 고풍스럽고 한가로운 맛을 더하게 한다.

집안 곳곳에 추사 김정희와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쓰인 ‘오수당(午睡堂, 낮잠을 자는 집)’, ‘매심사(梅心舍, 마음을 다하는 집)’라는 현판과 안채의 작은 방 바깥에는 최순우의 자필로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어 걸면 이곳이 바로 산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최순우의 고향인 개성의 두문산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알려졌다.

이 집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한국 미의 발전과 보전을 위해 평생의 삶을 살았던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자택으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저작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이 한 동안 관심을 모으며 최순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그가 살던 집도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최순우 고택의 보존과 개방이 시민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확보해 시민주도로 영구히 보전 관리하는 시민환경 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의하여 주도됐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이 집은 다세대주택 건립을 위해 헐릴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이 헐릴 위기에 있는 이 집을 매입하고, 다시 1년의 손질을 거쳐 2004년 4월에 공개돼 지금은 시민들이 운영, 관리하는 최초의 시민 문화유산이 됐다.

최순우는 생전에 한국미를 담담한 아름다움, 겸허와 실질, 소박한 아름다움, 필요미, 실용미, 자연과의 조화 등으로 표현하며 지금 이나마 한국의 미를 깨우치게 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베스트 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문화재 청장은 최순우의 후학인데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발문에 “한국의 아름다움, 미의식을 일깨우는 최고의 안내서이다. 우리에게 이런 책 한 권이 있다는 것이 크나큰 위안이고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라고 최순우의 한국 미를 보는 안목에 짙은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지금은 누구나 편히 보고 느낄 수 있는 그의 고택이 평생 한국의 미를 전도한 그가 후세에 전하는 공로라면, 자본의 논리에 허물어져 없어질 뻔한 그의 고택을 시민들의 정성으로 바로 세워 지금을 있게 한 것은 그를 위한 시민들의 공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순우 고택의 구석구석을 여유를 갖고 둘러보면 계절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자연을 집안에 둔 전통 한옥의 멋을 보게 된다. 자칫 휑하고 삭막할 수 있는 붉은 벽돌 담장을 한국적인 미감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해 생활이 곧 예술인 우리 조상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장식화 됐다고 할 수 있지만 키에 맞춰 나란히 늘어선 항아리가 정겨워 보인다. 최순우 고택에 사람이 살 시절에는 항아리 속에 간장, 고추장, 된장이 익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고택 뒷마당에는 쉼터가 있다. 편하게 보리차를 마시고 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어 혼자 보다는 둘이서 이곳을 찾으라는 뜻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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