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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본 역대 대통령들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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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본 역대 대통령들은 이랬다?”
  • 정수백 기자
  • 승인 2008.02.11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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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55년 신문인생’ 격동의 기록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이 55년 언론외길을 정리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김영사)’라는 책을 펴냈다.

지난 52년 조선일보 말단 기자로 입사한 방 회장은 62년 신문사 경영에 참여하면서 권력과 마주한 일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 때문에 책 안으로 들어가 보면 권력자의 속성을 알 수 있을 듯하다. 그 내부를 잠시 엿보면 이렇다….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을 보고 냉정하고 차갑다는 평가들이 많았는데 대체로 맞는 말인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 모임에서 “국민들 사이에 박 대통령의 인상이 너무 차갑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그런 오해가 불식될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수북이 쌓인 면담 신청서를 보여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만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뱀띠라서 천성이 차갑습니다”라고 말했다.

◇최규하

최 대통령은 보스 타입은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하니까 신문사 내부에서도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냐”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 의지와 군부의 집권 욕구 사이에 끼어 나름대로 애를 쓰는 걸 보면서 “체격 값은 한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최 대통령은 신문사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했다. 최 대통령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최 대통령은 “나도 대통령을 그만두게 되면 고향 강릉에 내려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최 대통령은 거취를 분명히 할 줄 아는 분”이라며 그의 낙향 계획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은 독대를 좋아했다. 만나면 30~40분간 혼자 떠들었다. 담배도 혼자만 피웠다.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답답해 “저도 담배 한 대 피우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제야 “아 담배를 피우시던가요?”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래서 담배를 서너대 피웠다.

독대를 마치고 나오니까 장세동 경호실장이 “방 사장님 담배 좀 안피우셨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다음번 만났을 때 그래도 담배를 피우니 장 실장은 더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삼갔다. 경호실장과 담배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게 구차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음식점 <장원>에서 신문사 발행인들을 초청해 저녁을 산 적이 있다. 그는 한참동안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더니 느닷없이 마룻바닥에 손을 대고 “잘 부탁합니다”하면서 큰절을 올렸다.

나는 속으로 “덩치는 커다란 사람이 흉한 구석이 있네”라고 생각했다. 퇴임 후 그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들통나 곤욕을 치를 때 나는 <장원>에서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말 누수현상이 생기니까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이인제씨가 대권도전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을 때였다.

다음 대선은 김대중과 이회창의 양자구도가 예상됐는데 여기에 이인제가 끼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김 대통령을 만난 김에 내가 “이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하고 물으니까, 김 대통령은 “이인제한테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이인제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저지할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서는 판사 출신의 꼬장꼬장한 이회창씨가 감사원장 할 때부터 자신한테 대들어 온 걸로 미루어 후임자가 돼서도 자신을 칠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반면 김대중씨는 서로 약점을 속속들이 잘 아니까 자기를 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김대중

88년 가을 김대중 평민당 총재로부터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지 1년쯤 됐을 때다. 자세히 보니까 그가 사람을 직시하지 못하고 위로 눈을 치켜뜨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사형선고까지 받는 등 험난한 정치역정을 거치면서 생긴 후유증으로 보였다.

창문이 덜컹 하는 소리가 나도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인 동정심이 일었다. 내가 작정하고 말했다.

“김 총재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다음 세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사상적 의심을 받고 있으니 이를 해소하십시오. 둘째 거짓말하고 앞뒤 다르다는 평이 있으니 이를 불식시키십시오. 셋째, 지역감정에서 벗어나 호남을 인질로 표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세가지 만 해결한다면 대통령은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로서는 진심어린 충고였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너무 입바른 소리를 했나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기에 그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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