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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 김기진의 문학연구] 시대 상황에 ‘카멜레온’ 처럼 행동한 계급문학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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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 김기진의 문학연구] 시대 상황에 ‘카멜레온’ 처럼 행동한 계급문학의 전사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2.12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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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박영희와 운명적 만남
고교 3년 재학중 3·1운동 하다  체포되기도
1921년 度日후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
학과공부보다는 노동운동·러시아 문학에 열중

인민재판 회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생
카프 2차 대규모 검거사건이후 본격 전향
1940년께 부터 본격적인 친일활동 시작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 했다”는 궤변도

1950년 7월 2일, 한국전쟁이 벌어져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서울 세종로 부민관(옛 국회의사당) 앞에 천 명 가까운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북한군이 ‘인민재판’을 여는 자리였다.

인민재판의 피고인은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김기진이었다. 김기진은 군중들 앞으로 끌려 나와 곧바로 ‘좌익활동의 변절자’, ‘일제 경찰의 밀정’ 등의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됐다. 선고가 떨어지자마자 형이 집행됐다.

몽둥이가 그의 뒷머리를 두 번 내리쳤고 머리에서는 피가 솟구치며 쓰러졌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 앞을 응시하더니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는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또 다시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그는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죽었다 생각됐다.

‘시신’은 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몇 시간 뒤에 한 내무서원에게 넘겨졌다. 죽었다 여겨지던 ‘시신’은 인민재판 나흘 후인 7월 6일 오후,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눈을 떴다. 드라마 같은 회생이었고 김기진의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이 장면은 한국전쟁의 비극상을 처절히 보여 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현대사 특히 현대문학사의 격변기를 산 최고 지식인의 인생역정을 압축적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김기진은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 김홍규와 어머니 김현수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1903년 6월 29일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충북 사람들은 김기진을 충북의 문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청원은 김기진이 우연히 태어나게 된 곳일 뿐 생활의 근거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정지용이라는 한국 현대 문학의 가장 비중있는 시인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거니와 정지용은 ‘고향’ 청주의 정경을 더없이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그린 ‘향수’를 써 충북 사람들은 정지용을 충북의 대표 문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터이다.

김기진의 형은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로 평가받는 김복진이다. 김기진은 형과 친구처럼 붙어 다녔다고 한다. 김복진은 어린 김기진에게 예술가적 자질을 심어주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기진은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신경향파 문학의 창시자인 박영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1919년 3학년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김기진은 유인물을 인쇄해 돌리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김기진이 일찍이 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기진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기도 전에 박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릿교대(立敎大) 영문과에 입학했다. 학과공부보다는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아소 히사시(麻生久) 교수로부터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러시아 문학에 대해 배우는데 열중했다.

김기진이 도쿄에서 유학하던 1920년대 초는 국제적으로 제국주의가 팽배해 열강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며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던 때였다. 이와 더불어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심각한 영향을 끼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시기부터 일기 시작한 민권운동이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아 마르크스 사상 즉,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가 김기진을 사회주의 문학가로 만들었던 것은 필연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군, 김군은 대학을 출석하는 것이 문학을 배우고 앞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는 길인 줄 아시오?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거울이라고 레닌은 말하지 않았소. 김군은 조선의 거울이 되시오. 그렇게 되려면 고국에 돌아가서 씨를 뿌리시오! 김군이 자기 생전 그 씨의 수확을 못할지라도 좋다는 결심을 하시오. 투르게네프의 ‘처녀지’와 같이 조선이라는 처녀지에 사회변혁의 씨를 뿌리고 개척할 때란 말이오.”

김기진이 유학 시절 아소 히사시에게서 들은 말이다.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사실 그 당시 일본 안의 프롤레타리아 싸움은 맹렬한 것이어서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혁명이 일어날 것 같았다”고 본 김기진에게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용은 시대의 흐름에의 순응이었다.

제국주의라는 지배형식은 반드시 식민지를 필요로 했고 조선도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일본의 식민지였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론으로 기능했고 일제식민지 하의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자가 됐고 적어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니거나 최소한 사회주의에 대한 동정심을 지녔다.

김기진은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비판한 문인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보고 배운 사회주의 지식을 바탕으로 식민 조선의 피지배상황을 냉철히 인식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초 조선 문단을 풍미하던 유미주의와 낭만주의를 질타하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역설하던 사람이 바로 김기진이었다.

김기진은 조선에 귀국해 1925년 8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예술가동맹)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카프’(KAPF)로 약칭한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이상화, 김복진, 조명희, 이기영, 박팔양 등이었다.

카프 초기의 주요 논객은 단연 박영희와 김기진을 꼽을 수 있고 작가로는 최서해, 이기영, 주요섭, 이상화 등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계급성을 떠나 한국 현대문학의 초석이 되는 중요 작품들의 작가들이다.

카프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기관지 성격의 ‘문예운동’을 발간하고 이듬해 9월 조직개편과 함께 체제를 정비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의 계급성과 형식 논쟁이 전개됐고 1930년 무렵 일본에서 활동하던 안막, 김남천, 임화 등이 가세했다.

카프의 시작은 자연발생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부적 논쟁과 김남천, 임화 등 이론가의 가세로 카프는 초기에 비해 명확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적품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방법으로 조직의 임무를 강조하며 정치적 성향이 점점 짙어졌다.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조선공산당협의회 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으며 핵심멤버 김남천을 비롯해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돼 카프의 조직활동은 많이 위축됐다.
 
1차 사건으로 활동이 정체돼 있던 1933년에는 소위 ‘신건설사 사건’(신건설은 사회주의 성향의 극단 이름임)으로 이기영, 한설야, 송영 등 23명이 체포되는 ‘카프 2차사건’을 겪으면서 카프는 급격히 조직이 와해됐다.

카프의 기초자 박영희는 유명한 전향문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를 쓰고 조직에서 이탈해 카프는 사실상 생명을 다했다.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기초했던 김기진은 1935년 5월 경기도 경찰국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했고 이것이 김기진 ‘전향’의 전조였다.

김기진은 1934년 이미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 사회주의 문학가 김기진과는 한참 엇갈린 행보였지만 매일신보에 입사한 것만 갖고 김기진이 ‘전향’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기진의 친일행각은 1938년 7월 3일 일제가 조선의 좌익전향자들을 규합해 만든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성준비위원으로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해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수필 ‘미나미 총독 수행기’는 그의 친일 문필활동의 개시였다. 이 글은 매일신보의 기자로서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면서 쓴 취재기다. 총독의 선정과 황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뻔한 내용이었다.

김기진의 전향을 통한 친일행각은 1935년 카프 탈퇴 후 약 3년간의 은둔기를 거쳐 1938년 경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만 30년대에는 소극적이고 미약한 수준 이었다. 그러다 1940년부터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세계대전의 참전을 미화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발전했다.

재밌는 사실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를 배격하던 그가 매일신보 기자를 하던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미두’(지금의 주식에 해당)에 미쳐 자본주의의 첨단을 걸었다는 것이다.

김기진은 해방 후에는 인민재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1951년 5월에 조직된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해 52년에는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남한 문단에서 가장 극렬한 반공작가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김기진은 회고록 ‘나의 회고록’에서 일제 말기의 친일 행각에 대해 ‘독립을 위한 비밀 공작을 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일본 관헌의 도움과 협조로 단시일에 100만원(지금의 100억)을 독립자금으로 조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기진과 함께 카프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문학가들은 상당수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즉, 문학을 통해 표출하려 했던 ‘이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프 문학가들이 지녔던 이념을 지금의 잣대로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는 없다.

김기진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 지식인이 시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적응’, ‘변절’, ‘전향’ 사이의 미묘한 개념 차이를 한 번은 고민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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