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이슈] “치료 늦으면 치사율 100%”...시베리아 덮친 ‘페스트균’ 공포
(시사캐스트, SISACAST= 이아름 기자)
지난 2일(현지시각) 러시아 시베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이르쿠츠크주 셀레호프의 한 감염병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다리야 시필로바(28) 연구원이 원인 불명의 중증 폐렴으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해당 연구원은 지난달 29일 중증 폐렴 증상으로 셀레호프 병원에 입원해 인공호흡기 치료 등을 받았지만 이달 2일 숨졌다.
1934년 설립된 ‘이르쿠츠크 시베리아·극동 방역연구소’는 러시아 연방 보건·방역당국인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Rosportrebnadzor) 산하의 국가 전문 감염병 연구기관이다.
현재 이곳에선 페스트를 비롯해 탄저병, 야토병, 브루셀라병, 렙토스피라증, 광견병, 진드기매개뇌염, 세균·바이러스성 고위험 감염병 등 각종 위험성 전염병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러시아 보건당국은 지난 4일 그의 사인을 ‘원인 불명 폐렴’으로 발표하며 연구소 사고도 없다고 발표했지만, 숨진 연구원과 접촉한 약 200명을 격리·관찰하는 등 해당 연구원이 숨진 병원을 봉쇄 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현지 매체는 시필로바가 지난달 살아 있는 페스트균이 들어 있는 시험관을 실수로 깨뜨린 뒤 균에 노출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러시아 보건 당국 책임자가 상황 점검을 위해 이르쿠츠크 지역을 찾았고, 지금까지 접촉자 가운데 페스트 추가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공식 발표는 없다.
러시아 당국은 지역 내 감염병 상황이 안정적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지만, 페스트 감염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14세기 유럽 전역 휩쓴 ‘흑사병’…얼마나 위험한가
페스트는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이름으로 악명 높았던 감염병으로, 쥐 같은 작은 야생 설치류와 그 몸에 사는 벼룩이 지닌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균에 의해 감염된다.
페스트는 감염 부위와 증상에 따라 크게 림프절 페스트, 패혈증 페스트, 폐페스트로 나뉜다. 가장 흔한 선 페스트는 감염된 벼룩에 물리거나 상처로 균이 들어와 걸리며, 초기에는 임파선이 붓거나 쑤시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세균이 혈액으로 번지면 패혈증 페스트형으로 진행되며, 피부와 조직 괴사, 쇼크 및 다발상 장기부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이 폐렴형, 즉 폐페스트이며, 24시간 안에 고열과 두통, 쇠약감, 기침, 흉통, 호흡곤란, 객혈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심한 경우 출혈과 조직 괴사가 일어나면서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의 피부가 검게 변하기도 하는데,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증상에서 유래됐다.
폐페스트는 호흡기 비말을 통해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한 형태로, 치명률 역시 높다. WHO의 페스트 감시 지침에 따르면 폐페스트의 잠복기는 통상 1~3일이며, 효과적인 항생제 치료가 증상 발생 후 24~36시간 안에 시작되지 않을 경우 사망 위험이 급격히 커진다.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에서만 5000만 명 넘는 희생자를 낸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당시 유럽 인구 3분의 1에서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는 원인균은 물론 감염 경로나 효과적인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아 피해 규모가 컸지만, 지금은 시프로플록사신·젠타마이신·스트렙토마이신 같은 항생제를 10~14일 쓰면 낫는다.
CDC(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가 1946~2017년 폐페스트 환자 기록을 모아 분석한 결과 항생제를 투여받지 않은 환자의 통합 사망률은 98%, 항생제 치료 받은 환자는 17%인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도 예의주시, 추가 정보 공개요구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미국은 러시아에 보다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장관은 지난 6일 러시아 측에 이번 사건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 역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통화가 예정돼 있다면서 미국 정보기관들도 상황 파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필요로 할 경우 미국이 지원할 의사가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페스트를 1급 법정감염병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페스트 환자가 나온 적은 없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증상 2일 안에 항생제를 쓰면 치료할 수 있고, 조기에 치료하면 림프절 페스트의 치사율을 5~10% 수준까지 낮출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현시점에서 우리 국민이 페스트 감염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지만, 러시아 측 조사에서 실제 페스트 감염이나 연구시설 유출이 확인되거나 2차 감염자가 발생할 경우 위험평가와 검역조치가 달라질 가능성은 있다.
결국 이번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위험 병원체를 다루는 연구시설에서는 작은 안전사고 하나도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러시아 당국이 사망 원인과 실험실 사고 여부, 접촉자 검사 결과를 국제사회에 얼마나 신속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느냐가 이번 사태의 불안을 가라앉힐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