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_Anchor] 손바닥 안의 눈부신 아고라. 권력의 확성기인가, 숭고한 영혼의 거울인가 (2/2)
드넓은 바다 위로 사유의 닻을 내려 문화적 심층을 길어 올리는 칼럼 ‘좋아요’의 도파민 숫자를 걷어내면 보이는, 진정한 공감 연대의 SNS 활용법은 따로 있다? 下편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그럼에도 사용자가 SNS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과 더불어, 때마다 주변 모두를 붙잡고 한꺼번에 눈을 맞춰가며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공유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선의(善意)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이에 더해 유명인과 정치 지도자, 내지는 권력자들은 반나절만 침묵해도 주도권을 빼앗겨 무능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걱정과 언제라도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큰 작용을 하는데,
이러한 당위성과 존재론적 불안은 또 다른 눈먼 맹점을 잉태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의 발신 하나가 대중과의 쌍방향 교감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 순간 발신자는 SNS가 지닌 태생적 일방성을 망각해 버리고 마는데,
다시 말해 일반인들에게 SNS는 결핍을 털어놓고 일상의 체온을 나누는 수평적 연대의 장소에 머물지만 공적 아우라를 지닌 이들에게 SNS는,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 바쁜 과시의 무대를 넘어, 치적을 포장하고 지지세를 결집하는 등 확성기의 형태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다.
여기서 해당 권력자가 자신의 SNS 속 반응을 ‘살아있는 민심’으로 착각하는 순간, 소수의 극단주의가 다수의 상식을 압도하는 다소 위험한 민주주의의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에 실제로 SNS상에서 비슷한 소수 의견끼리 뭉치고 서로의 확신을 증폭시키는 폐쇄적 환경, 이른바 거대한 메아리방인 ‘에코 체임버(Echo Chamber)’가 관찰된다는 연구가 적지 않은 바,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23년 발표한 분석을 봐도 이러한 광장의 기형적 구조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일론 머스크'의 인수 이후 미국 성인 트위터(현 X) 이용자 중 게시량 상위 20%가 미국 성인 이용자 트윗의 무려 98%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과거 2021년 조사에서도 상위 25%가 97%를 작성했던 점을 상기하면 플랫폼의 주인이 바뀐 뒤에도 '소수의 과잉된 목청이 광장을 독점하는 현상'은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셈이다.
직접 소통이 주는 효능감이 되레 권력자의 시야를 좁히고 확증편향의 늪으로 밀어 넣는 역설. 지도자에게 SNS가 달콤한 권력의 확성기인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을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전체 분위기와 흐름까지 주도할 수 있는 유명 권력자들의 SNS활동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흩어져 있는 대중의 고단한 숨결을 폭넓게 감싸 안으면서도, 그들의 작은 방 하나하나를 성숙한 시민의 광장 안으로 엮어낼 수 있는, '통합의 그릇'이 되어야 마땅하단 얘기다.
역사의 시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오늘날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안겨준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는 시장이자 시민들의 공적 생활이 펼쳐지던 광장이었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정치와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했고, 민회와 법정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비록 그 참여권은 성인 남성 시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직접민주주의의 요람이었다.
허나 그러한 민주정 역시 대중의 판단과 정치적 선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던 정치 지도자들, 이른바 '데마고그(demagogue)'*의 존재는 고대 아테네 정치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 정치적 대립과 지도자들의 판단은 민주정의 운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아테네의 민주정은 전쟁 참패와 제도적 위기, 그리고 반민주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두 차례나 전복되는 격랑을 겪게 된다.
*데마고그(Demagogue): 고대 그리스어 'demagogos'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민중의 지도자'라는 뜻이었다. 허나 후대에는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해 지지를 얻으려는 선동 정치가를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발전했다.
21세기의 손바닥 위에 열린 디지털 아고라 역시 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광장은 과거 아테네의 돌바닥보다 훨씬 넓고 동시에 더 자극적이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 평평한 무대에서 정작 희귀해진 것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며 묵묵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침묵과 경청’의 윤리인 것을.
광장의 품격이란 누가 가장 큰 소리를 외치느냐가 아니라, 제일 낮은 곳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SNS를 통한 진정한 연대의 명확한 선결 조건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력자 스스로가 손바닥 창이라는 참호를 박차고 나와 침묵이 곧 패배라는 의식을 버리고, 즉흥적인 문장 몇 줄 대신 헌법과 (행정) 시스템이라는 정교한 제도를 통해 국정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침묵의 미덕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정적(靜寂)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시급하단 얘기다.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사회적 계약을 축적해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국가 지도자의 언어는 대부분 사적 감정의 배출구나 편향된 진영 결집의 도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도자의 말이란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를 수호하면서도 '도의(道義)'를 바로 세워 서로의 갈등을 봉합하는 가장 엄중하고도 신중한 언어여야 마땅했다.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부터 근대 민주주의의 링컨이나 처칠에 이르기까지, 국가 수반의 말은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절제와 숙의의 산물이어야 했다. 허나 새벽녘 타전되는 대통령의 짧은 한탄이나 즉흥적인 반박, 특정인과의 사소한 팔로우 정리 같은 것들은 권력의 신비와 권위를 스스로 발가벗겨버린다.
권위주의의 탈피라는 미명 아래 인류 문명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공적 책무의 무게와 국가적 품격이 일종의 가벼움으로 전락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문명사적 법치가 한 지도자 개인의 자의적 충동에 의해 흔들릴 수도 있다라는, 또 하나의 작지 않은 위험 징후로도 의심되는 바,
이에 대중은 지도자의 SNS식 발언에 환호하거나 불필요한 소음으로 치부하는 등, 관음증적 관심과 쾌락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 몇 글자, 몇 줄의 쇼맨십?이 아닌 지난한 제도적 조율로부터 이루어져야함을 엄중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손바닥 안의 좁은 화면을 끄고 국가 전체의 넓은 지평을 바라보는 성찰적 결단.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지지자 반대편의 서늘한 눈빛까지도 온전히 품에 안을 때에 비로소 권력자는, 불안에 쫓기는 디지털 투사 대신 문명이 요구하는 진정한 시대의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것이다.
손쉬운 확성기의 유혹을 떨쳐내고 자신의 내면을 비워냄으로 SNS를 보다 성숙한 숙의의 광장으로 되돌려 놓는 일. 이와 더불어 말하기보단 듣기를, 주장하기보단 공감하기를 택할 때 이 사각의 프레임(SNS)은 비로소, 영혼 없는 소음의 배출구를 벗어나 흔들리는 대중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진정한 ‘마음의 다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