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WHY'] 당신의 취향은 ‘왜' 어제에만 머물러 있는 걸까? (1부. 알고리즘의 안락한 울타리)

- '왜'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당연한 것들의 다양한 이면을 들춰보는 시간 - ​문화적 상식을 비틀어(왜:歪),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역설 인문학 산책 - ​알고리즘의 오만한(?) 초대 : 당당해 보이는 추천 리스트건만 왜 스크롤할 땐 씁쓸?

2026-05-04     양태진 기자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잠 못 드는 밤. 뒤척이기만을 반복하던 그때,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집요한 유혹에 한 번쯤 넘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보다 더 날 잘 안다 자부하는 그 안의 알고리즘은 곧이어 '추천' 또는 '맞춤'이란 화려한 성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우린 역설적이게도 스크롤과 클릭만을 반복하다 씁쓸한 갈증 속에 다시 눈을 감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 나를 위한 추천이건만, 왜 우린 잠시의 만족감은 뒤로한 채, 묘한 피로감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래도 나름 완벽해보이는 추천 리스트이건만, 왜 우린 다소 무기력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나한테만 맞춰진 세상 속에서 헛헛해 하는 건지. 여기에 더해, 나만의 취향이란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건지 그런 근원적 물음까지도 고개를 쳐 드는 요즘,

 

그렇다면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메인 화면은 더이상 단순한 선택 공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디지털 거울'일 뿐,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오늘의 내가 아닌 어제의 흔적 짜깁기가 아닐런지.

​이처럼 알고리즘은 과거의 기록을 먹고 산다. 즉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미래는 결국 해당 사용자에 관한 '과거'를 무한으로 복제해 놓은 것에 불과하단 얘기. 새로운 장르나 여타 다른 형태의 예술에 도전하거나, 전혀 다른 결의 영화나 컨텐츠로 감동할 기회는 이런 시스템의 효율성 안에서 조용히 삭제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럼 과연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취향 확장의 포기는 정당한 것인지 결정적 물음이 치고 올라온다. 알고리즘이 짜준 촘촘한 그물망 안에서 안전함을 향유(?)할 순 있었을진 모르겠으나, 그 안에선 결코 만나기 힘들었을 '새로운 나'의 모습, 그러니까 데이터가 정의한 좁은 틀 안에 갇힌 내가 아닌 진짜 무엇에 가슴이 뛰고 무엇에 열광했었는지, 그런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본래의 내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행복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갈 때 보다, 기대하지 않던 골목에서 취향에 맞는 음식이나 음악과 마주할 때 더 폭발하는 법. 하지만 알고리즘은 우리가 '길을 잃을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가운데서 오로지, 데이터가 분류해 낸 '더 좋아할 법한' 울타리만을 쳐 둘 뿐인 것이다.

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 교수가 제안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의 핵심 기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 기업은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 이익을 위해 우리의 행동을 '수정'하고 '통제'하는 단계로까지 진입했다는 것. 이에 우리는 알고리즘이 택한 그 좁아진 선택의 폭 안에서 더 편리해졌다고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을 도와주기 보단 '선택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유인해온 알고리즘으로 우린 자칫, '선택 근육'이 퇴화해 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주도권을 데이터에 저당 잡혀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저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에서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경고를 한 바 있건만, 알고리즘은 이러한 과잉된 선택지를 줄여주는 척하면서 사실상 우리의 결정권을 대신 행사해 오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 우리는 보다 충격적인 가설과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맞추는 것이 아닌, 우리를 '예측 가능한 존재'로 성형해 온 것이라는 것. 그럼 당신이 갑자기 엉뚱한 것을 좋아하게 되면 오류를 일으키거나, 되려 그 변함이 제거되도록 끊임없이 익숙한 것만을 더 주입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릭 사댕(Eric Sadin)'의 '알고리즘적 통치성(Algorithmic Governmentality)' - 인간의 자율적 판단이 기계의 지시로 대체되는 시대적 위험성 - 으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선 알고리즘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변화하는 인간'이다. 시스템은 당신이 어제 좋아했던 것을 오늘 더 강렬하게 좋아하도록 몰아세우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잠재력, 즉 내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인간의 가변성'을 데이터의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과감히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넷플릭스 화면 앞에서 느끼는 미묘한 피로감은 사실, 영혼이 보내온 조용한 경고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데이터 뭉치보다 더 큰 존재다"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기계가 규정한 '나'라는 틀 안에 갇혀 질식해가던 신호였던 셈.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현대인이 기술적 가속 속에서 세상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공명(Resonance)*의 상실' 상태에 빠져 있다고 설명한다. 알고리즘이 짜준 완벽한 식단에는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진짜 '공명'이 빠져 있다라는 것.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의 ‘공명(Resonance)’ : 주체와 세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함께 진동하는 상태를 뜻하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통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세상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오직 예측 불가능한 우연 속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여기서의 진정한 울림은, 데이터가 결코 계산하지 못하는 '오류'에서 탄생할 것이기에, 인생을 바꾼 책이나 운명적 사랑 등, 우리가 헤매고 실패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마주하던 '투박한 우연'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들에 대해 우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가 말한 '블랙 스완(Black Swan)'에서 처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순간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서 찾아올 것이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러한 '헤맴의 과정'을 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알고리즘의 '최단 거리 만족'에서 벗어나,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발견했을 때에 느꼈던 도파민 너머의 깊은 성취감 만큼은 되찾아야 한다. 이는 '영혼의 영양실조'로도 표현될 수 있을 만한 현대인들의 현 상태에 있어, 인간 존재의 '유일성(Uniqueness)' 내지는 '고유성', 그리고 숭고한 영혼 만큼은 잘 지켜보자라는 사회적 합의와 사명감, 그리고 그에 따른 깊은 성찰 또한 내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