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슬의 웰라이프]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2026-05-04     박이슬 문화평론가

(시사캐스트, SISACAST= 박이슬 문화평론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버틴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감정을 내려놓을 곳이 마땅치 않은 삶.

그래서 많은 이들은 바깥에서의 균형이 유지되기를 바라며 적어도 일하는 공간만큼은 견딜 수 있는 곳이기를 기대한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는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

그 기대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유하는 근본적인 전제에 가깝다.

그러나 그 전제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전혀 다른 종류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한 일터에서 실제 발생한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최초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팀장이라는 직위는 갖고 있었지만 경력으로 입사한 계약직이었고, 그 팀의 팀원들은 원래부터 수년간 함께 일해온 정규직이었다.

팀장이라는 명칭은 형식상 책임을 가진 위치였지만, 실제 관계에서는 그 지위가 충분한 보호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였다.

갈등은 점차 일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업무 지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나아가 업무 지시 자체를 부정하는 반응까지 나타났다.

팀원에게 홍보 업무에 집중해 달라고 요청하자 “업무를 과도하게 주지 말라” “사비라도 들여 하객알바라도 동원하겠다”는 식으로 맞받아치는 일이 이어졌다.

이는 업무 체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수준의 문제였으며 이정도면 이 팀은 실상 팀장이라는 직급이 필요없는 곳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는 결국 더 이상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표를 찾아가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며, 일정 기간만이라도 분리를 해 달라고 울면서 요청했다.

그 요청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달랐다. 팀장이라는 이유로 그 정도는 감수하고 버텨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 순간, 보호를 요청하는 신호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전환되었다.

어떠한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팀원들에게 해당 발언을 한 사람과 일정 기간 접촉을 줄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행동은 오히려 문제로 해석되었고 징계 대상이 되었다.

이후 회사측은 해당 팀장이 근무시간이 아닐때 “근무시간 전”이라고 발언했다는 것과, 팀장으로 수행해 온 일상적인 업무 지시까지 하나씩 문제 행위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특정 사건을 넘어, 개인의 행동 전반이 사후적으로 문제화되는 흐름이었다.

결국에는 너는 징계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며, 그 과정에서 “네 편을 하나라도 만들어보라”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며 피해자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장기간 팀장으로서의 권한은 제한한 조치를 내린 채, 팀원들과의 감성적교감을 강요하고 사직을 종용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대응에서도 심화되었다.

해당 일터는 실질적인 분리조치는 전혀 진행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이행한 것처럼 꾸민 자료를 제출하였으며 형식적으로는 조정이나 소통으로 표현되었지만, 짐승에게도 쉬이 하지 않을 “감성적 교감”이라는 방법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상황과 기록 사이의 간극은 당사자에게 또 다른 혼란을 남겼고, 마지막까지 형성된 불신은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려운 상태로 굳어졌다.

결국 그곳을 떠났지만 그 뒤에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수면 중 반복되는 트라우마와 보호받고 싶었던 공동체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음에도 하루하루 후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는 끝까지 맞추려 하기보다 어느 지점에서 끊어냈어야 했는데.. 초기에 그만두지 못한 것.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일터를 선택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버티는 것을 미덕이라 배운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서의 버팀은 영혼을 회복 불가능하게 마모시킬 뿐이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인내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밑 빠진 독에 자신의 생명력을 들이붓는 것과 같다.

이제 우리는 버티는 삶에 대해 다시 정의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간신히 견뎌낸 사투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서 있는 곳이 나를 깎아내려야만 유지되는 자리라면, 그때 필요한 것은 더 오래 견디는 힘이 아니라 빠르게 잘못된 방향을 인식하고 벗어나는 결단이다.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일은 끝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지 않는 울타리를 기꺼이 박차고 나오는 일이다. 당신의 삶은 누군가의 방관과 학대 속에 소모되어도 좋을 만큼 가볍지 않기에. [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