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세상 읽기 No.1] 파수꾼의 두 얼굴 : 괴물이 된 알론조와 고독한 세르피코 (1부)

스크린 렌즈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정밀하게 읽어내는 시간 기존의 인물에 집중했던 [영화로운 수요 1인] 코너가 개편되었습니다. 법을 수호하는 파수꾼은 어떻게 괴물이 되고,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2026-07-17     양태진 기자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는 것인지, 영화가 차마 현실을 다 담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시대다. 신뢰와 정의의 최전선에 서서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뉴스가 연일 지면을 장식할 때, 대중은 분노를 넘어 깊은 무력감에 빠지는 법.

이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스스로 법 위의 군림자가 되는 순간, 그들이 쥔 총구와 배지는 공공의 방패가 아닌 가장 비겁하고도 악랄한 무기가 되기 때문일 터,

 

여기,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법의 수호자라는 같은 이름을 달고 달렸던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지금 우리가 발 디딘 현실을 정밀하게 읽어보려 한다. 2001년의 서늘한 서스펜스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와 1973년의 뜨거운 실화 <세르피코(Serpico)>가 바로 그것.

이 두 영화는 공권력의 타락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심연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심연을 대하는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극단으로 갈라질 수 있는지를, 거울을 사이에 둔 대척점처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막. 늑대를 잡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된 남자 (영화 '트레이닝 데이'의 알론조)

영화 <트레이닝 데이>의 베테랑 마약수사반 형사 '알론조 해리스'(덴젤 워싱턴 분)는 LA 경찰청 소속이지만, LA의 범죄 지대에서 법과 원칙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나름의 권력자다. 그가 지배(?)하는 로스앤젤레스의 어두운 뒷골목에선 법전의 활자 또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데,

신참 형사 '제이크 호이트'(에단 호크 분)가 하루 동안 그의 차에 동승한 날, '알론조'는 ‘늑대를 잡으려면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지독한 현실론을 내세우며 '제이크'의 도덕적 신념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OCD : 심리학, 의학 용어인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를 뜻하는 약어로, 영화 속 '알론조'가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손목시계를 병적으로 자주 만지거나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고 조정하는 반복적인 행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To protect the sheep, you gotta catch the wolf. And it takes a wolf to catch a wolf.”

"양을 지키려면 늑대를 잡아야지. 그리고 그 늑대를 사냥할 수 있는 건, 오직 또 다른 늑대뿐이라구."

 

'알론조'의 이 달콤하고도 기만적인 독백은 비리 권력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쓰는 가장 흔한 논리다. 그는 정의라는 목적을 위해 악이란 수단을 동원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본질은 추악한 탐욕에 불과한 것.

 

마약상들의 돈을 가로채고, 가짜 압수수색 영장으로 민가를 털며, 자신을 방해하는 자는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합법적으로 제거한다. 이러한 '알론조'의 과도한 독선은 공권력이 통제를 잃고 폭주할 때 과연 얼마나 참혹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는지, 영화는 그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알론조'에게 '공권력'이란, 정의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방패막이었을 뿐, 그가 뿜어내던 압도적인 위압감도 결국, 권력 위에 남몰래 쓴 '합법'의 가면으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는 조직 내부의 묵인과 연대라는 시스템의 카르텔 속에서 점점 더 대담해졌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받는, ‘합법적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헌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알론조'가 구축한 제국이 단지 영화라는 스크린 속에만 갇힌 허구가 아님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일선 경찰서의 부실 수사와 은폐, 그리고 증거를 지우고 카르텔을 지키기 위해 사법 망을 기만했던 일련의 비리 사건들을 보면, 

'안전'과 '수사'라는 숭고한 임무 뒤에 숨은 공권력의 사적 유착과 도덕적 불감증 등이, 영화 속 '알론조'의 독선과 서늘하리만치 닮아 있는 것. 제 식구를 감싸고 진실을 은폐, 묵살하려던 이 현실의 어두운 이면은

25년 전 이 영화가 던진 "우리는 파수꾼의 눈과 행동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함을, 그리고 그것이 뼈아픈 시의적 경고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결국 '알론조'의 폭주는 그가 믿었던 시스템과 동료들이 도덕적 한계점에 도달해 그를 외면한 순간, 비참한 파멸의 뇌관을 터뜨리고만다. '늑대를 잡기 위해 스스로 늑대가 되었다'던 그의 호기로운 변명은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비겁한 자기합리화였을 뿐,

손목시계를 매만지며 그토록 통제하려 애썼던 '알론조'의 판은 결국, 그가 멸시하던 거리의 룰과 사법 정의라는 양날의 칼날에 의해 사정없이 해체되고 만다. 법이라는 면죄부를 빼앗긴 파수꾼이 마주하게 될 운명은 오직 단 하나, 자신이 파놓은 심연 속으로의 참혹한 추락뿐인 것을.[시사캐스트]

 

​다음 [2부]로 계속됩니다. (침묵 속에서 홀로 상식을 외친 자, <세르피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