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역대급 사진들로 스크린을 꽉 채웠던 사건이 있었다. 불세출의 영감을 갖고 태어난 그 여인의 손길은 곧, 후대인들의 두 눈을 단번에 사로잡기에 이르는데.. 이 모든 사진을 거의 현상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1/2시간.
(시사캐스트, SISACAST= 양태진 기자)
세상에 변화를 몰고온 위인들은 모두 한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의 삶도 일종의 사사로운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이를 뒤집어 말하면, 평범 이상의 것들만 남아버린 그들의 삶도 -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인 양 - 지극히도 유별난 인생으로 포장돼 버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정작 단 한 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그저 평범함이란 미명(美名)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 어찌보면 우리보다도 더 평범하기만한 - 그런 존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순수하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탐미하는 사진이 여기 있다. 그런데 이같은 사진은 곧, 수백 장, 수천 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 안에 깃든 모든 향기를 제대로 느껴볼 새도 없이, 우린 그 평범하다 못해 지극히도 일상적인 과거의 사진들 속으로, 또 다른 위대한 여행을 감행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에 다시금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바로 '비비안 마이어'라는, 단 한 명의 무명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자신을 작가라 칭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사진 작업은 베일에 싸여진 채,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 또한 박스에 감금되다시피하여 빛을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전문 사진작가로서의 대우나 인정을 그 누구한테도 받은 적이 전무했던 것.
그럼에도, 한순간의 셔터를 통한 마법을 통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그녀의 평범한 삶은 곧 뭇사람들의 위대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갔다. 그녀의 실제 삶 속 면면을 전부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녀는 그러했을 것이다. 소위 넓은 세상이 작은 박스 안으로 몰아넣어지는 그 예술적 경이를, 온전히 혼자만 독차지한 채로 마음껏 누려 마땅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 한 여성의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시각 하나가 그것으로 포착된 위대한 순간들과 만난 그 경이의 현장을 함께 거닐어 보자. 또 누가 알겠는가. 그녀와도 같은 위대한 천재성이 내 안에서 작게나마 꿈틀거릴 수 있을지.
세상의 어떤 카메라도 사람과 마주하면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법. 그런 카메라의 셔터를 냉철한 본능으로 마구(?) 눌러댔던 그녀에 관한 다큐,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누구나 그렇듯,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시대를 뛰어 넘는 감동이 휘몰아칠 때가 있다. 거기다 그 시대의 잔잔한 분위기 까지 담고 있다면 금상첨화인 것. 그런데 이번 다큐에서 드러난 한 무명작가의 작품은 이 둘 모두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이 작가가 지닌 인간 본연의 모습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법. 바로 그러한 감추어진 비밀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위인도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드러내는 데 마냥 좋아할리는 없는 것이기에, 누군가의 개인사를 들춰내는 데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할 듯해 보였다. 세상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그런 무명인으로서의 삶 또한 작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당사자의 동의 없이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으로 선정한 뒤에, 그 또는 그녀의 과거를 전부 들춰내는 행위는 어찌보면, 도의적 차원에서 또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숨어있던 예술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고찰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면, 약간은 고개를 끄덕여볼 수도 있을 노릇이겠지만, 어느 순간 떠나버린 작가의 일면만을 바라보려는 자세는 자칫, 한 인물의 전체를 간과해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큐의 본질로 빠져듬과 동시에, 그 이야기의 힘과 취지에 녹아들 때면, 이러한 비판적 해석을 그저 일부의 독자 몫으로만 남겨놓는 것이 더 현명해 보이는 상황. 그것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대하는 전문 작가들의 자세에서부터, 그녀를 인정하기 시작한 세상의 움직임에 따른 작품해석이 아주 심도있으면서도 임팩트있게 펼쳐지기에 더 그렇다.
'비비안 마이어' 그녀는 말한다. 사람이 더할 나위없는 한 사람으로서 거듭나 보일 수 있는 순간은 그저 딱 한 찰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말 또한 그녀가 직접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사진을 혼자 바라보기만 하던 필자인 나 자신이 나지막히 뇌까려본 말일 뿐. 하지만 그녀가 이런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을 거라 추론해 보는 것 또한 사진을 바라보는 가치를 더해 주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녀의 사진은 솔직함과 과감함의 경계를 제 맘대로 넘나들고 있었기에, 사람을 통해 사람을 들여다 보는 이 놀라운 경지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또 어떤 예술이 이같은 경이로움을 또 발휘해 낼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에 다큐는 곧, 그런 작품들을 쏟아내던 당시의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 그녀의 미스테리한 구석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무명작가였던 그녀가 도대체 왜, 자신이 찍은 대부분 사진들은 현상도 하지 않은 채로, 사후 벼룩시장에서나 자신의 짐짝들과 함께 나돌도록 했을지, 그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다큐의 감독이자 나래이터인 '존 말루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런 평범함 속에서 흑진주를 찾아내기에 이르렀고, 그저 분주히 움직이며 매일을 고뇌하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도 '비비안'식의 빛나는 작품들로 인해, 보다 환한 예술적 환경에 놓인 자신을 발견해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장구
이는 다시 말해 그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만의 위대함이 내재되어 있는 이상, 세상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 물론, 아직까지 재야에 묻혀 있기만 한 작품들이 넘쳐날 수도 있는 것이거니와, 예술가의 생애 안에서 그 작품에 대한 찬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체 예술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지, 그런 생각을 모두 제외하고 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매 작품을 만들어내던 과정으로 돌아가 볼 때, 그녀가 한순간 한순간 포착해 내던 그 실상은 어떠했을까? 또 위에서의 사진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포착해 낸 이후, 그녀는 또 어떤 표정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며, 다음의 여정을 이어갔을 것이냐는 말이다. 이러한 궁금증은 모든 사진에 내재되어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 유달리 그런 물음표가 많이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진으로 포착해낸 그녀만의 감성이 전달되기 때문일 것.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도 그 찍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작품이 되기도, 또 그저 그런 이미지로 흩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비비안 마이어'도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누구도 사진에 대한 감상에 빠져볼 여유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아날로그식 카메라를 홀로 든 채 도심을 누비고 다니던 당차고 솔직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