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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에 펜들어 다시 독자 사로잡은 ‘언어의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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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에 펜들어 다시 독자 사로잡은 ‘언어의 마술사’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2.15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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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9년여만에 신작소설 ‘친절한 복희씨’ 출간
베스트셀러 올라 “40년 문학인생 백미평”
조부모-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미8군 PX서 근무하다 박수근 화백과 인연
1970년 여성동아 소설공모 당선돼 등단
1988년 남편-아들 연이어 잃는 아픔겪어
이상문학상-호암상-황순원 문학상등 수상

작가 박완서는 1931년 10월 20일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아버지 박영노(朴泳魯)와 어머니 홍기숙(洪己宿)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열 살 터울인 오빠가 있었다.

193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오빠만 데리고 서울로 떠나 박완서는 조부모와 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작은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박완서에게 친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박완서는 1938년 서울로 와서 살게 되면서 매동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44년에는 숙명여고(당시 6년제)에 입학했다. 1945년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져 고향인 개성으로 이사, 호수돈여고로 전학했다.

그러나 실제로 다니지는 않았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후 서울로 다시 돌아와 숙명여고를 계속 다녔다. 여중 5학년 때 담임을 맡은 소설가 박노갑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완서는 서울 현저동 골짜기에서 매동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너무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도 뽑혔다. 그렇지만 일제 시대가 끝날 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늘 쭈뼛쭈뼛 해야 했다.

박완서는 1950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자마자 6.25 전쟁이 터져 정통 문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작가로서 필요한 기본 소양은 여고 시절 박노갑 선생에게서 받은 교육으로 거의 충분했다고 한다.

박노갑은 문학소녀들이 갖기 쉬운 환상이나 미사여구를 경계하도록 가르쳤고 남의 흉내를 내지 말라고 얘기했다. 박완서는 박노갑을 문학이 무엇인가를 엄정하게 보여준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만 했을 뿐 실제 다닌 기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 6월 초순에 입학식이 있었고 곧바로 한국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가 죽고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미군 부대에 취직, 미8군 PX(동화백화점, 곧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의 초상화부에 근무하게 됐는데 거기서 박수근 화백을 만났다. 박수근과의 만남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박완서는 미8군 PX의 한국물산 위탁매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초상화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그가 맡은 일은 화가들의 뒷바라지나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차츰 군인들에게 말 붙이는 일이 능숙해졌고 박수근과도 연결된다.

어려운 시대에 오로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함께 자리했던, 한국의 밀레 박수근과 소설계의 거봉으로도 칭해지는 작가 박완서,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거부감과 상처 입은 자존심으로 인한 안하무인격 욕구불만을 표출하던 박완서.

그런 박완서를 아버지 혹은 선한 이웃 어른처럼 친근감을 가지고 동류의식을 표현하며 덤덤하게 감싸준 박수근. 이들은 서로에게 예술적 촉매재였던 것 같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처음 봤을 때 ‘간판쟁이’로 알았다.
 
그러다 박수근이 화집을 들고와 그것을 펼쳐 한 작품을 박완서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야 박수근의 화가로서의 면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박수근의 작품 ‘나무와 여인’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의 표지 그림으로 쓰였다.

박완서는 1953년 호영진(扈榮鎭)과 결혼, 이후 1남 4녀의 자녀를 뒀다.(1954년 원숙, 1955년 원순, 1958년 원경, 1960년 원균, 1963년 원태).

1970년 ‘나목(裸木)’으로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문단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때 박완서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등단한 지 30년이 지나 이제는 일흔이 넘었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여전히 왕성하다. 박완서라는 작가의 이미지는 커다란 나무로 다가 온다. 비, 바람 등 온갖 풍파 속에서도 굳건하게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거목의 느낌을 받는다.

박완서의 작품세계는 한국전쟁과 여성문제, 개인사와 가족사를 망라한다. ‘나목’과 ‘목마른 계절’,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아저씨의 훈장’, ‘겨울 나들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이 한국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이다.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등은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쓴 글이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박완서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해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박완서는 지난해에 산문집 ‘호미’를 펴내며 식지 않는 창작욕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발표한 작품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다작이지만 대표작만을 개관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나목’은 지금의 박완서를 만들어 준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자신의 체험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6.25 전쟁의 시대적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옥희도라는 미술가가 여성 화자의 관점에서 잘 그려져 있다.

전쟁의 삭막함 속에서는 고목으로 보였으나 안정된 상황에서는 나목으로 보이는 평범한 일상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통찰한 예술가의 혜안이 역설적으로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연작은 지금, 이곳 하면 떠올리는 몇몇 개념과는 무관한 시공간을 다루고 있으며 또 이전의 박완서 소설과 유사한 장면과 에피소드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분명 90년대의 문제적인 소설 중의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연작은 작가 박완서의 소설적 역정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엄마의 말뚝’ 연작의 첫 번째 ‘엄마의 말뚝 1’은 고향에서 남편을 잃은 후, 어린 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한 어머니가 억척스러움으로 곤궁한 생활을 극복하며 서울에 터를 잡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상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억척스러움과 의지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어머니로의 모습을 작품 전체에 그리고 있다.

‘도둑 맞은 가난’은 가족을 모두 잃고 인형 옷을 만들며 연탄 값을 아끼기 위해 남자와 동거를 하는 한 소녀를 통해 19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 과정을 배경으로 급속도의 산업화 과정이 빚은 인간소외, 소시민적 편의주의에 의한 자기기만, 관료사회의 횡포와 약한 자들의 인권문제, 타락 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섬세하고 신랄한 필치로 묘사하고 비판한다.

주인공 ‘나’의 가족은 아버지가 실직한 이후 어머니의 허영심과 체면 때문에 급속히 가난한 처지에 놓인다. 결국 모든 재산을 날리고 온 가족이 판자촌으로 이사를 하고 나는 인형 옷을 만드는 일이라도 해서 먹고살 길을 모색하지만 가난을 이겨 내지 못한 가족들은 결국 연탄가스로 자살하고 나 홀로 남는다.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도금공장에 다니는 청년과 “같이 살면 하룻밤에 연탄 반장을 아낄 수 있지 않느냐”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돈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 뜻 때문에 빈민촌에 보내진 부잣집 대학생임을 알게 된 나는 “이제 부자들이 가난마저 훔쳐간다”고 울부짖는다.

‘목마른 계절’을 통해 박완서는 청년기에 6.25 전쟁을 겪은 세대의 역사적 감각을 그대로 표출해 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이 처절히 파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전쟁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갖는 휴머니즘적 성격을 보여준다.

혈육 간에 원수가 돼야 하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외침이 소설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전쟁은 가족의 상실과 죽음으로 체감되기 때문에 그 뒤에 자리한 어떠한 숭고한 대의명분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편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작가가 스무 살의 성년으로 들어서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20대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은 물론 많은 독자들에게 그 동안 펼쳐왔던 박완서의 그 어느 작품세계보다 의미 깊고 소중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 소설이 작가가 가장 예민하고 감수성이 강하며 사고와 가치관이 형성된 스무 살 때의 이야기이자, 소설이 펼쳐지는 공간이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인 파탄을 안겨다주는 참혹한 전쟁 속이라는 점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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