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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병구,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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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병구,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 출간
  • 윤동철 기자
  • 승인 2012.01.30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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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한국 정치사의 거목이다. 그런 YS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들은 아직도 92년 대선 승리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특히 YS의 대표적인 조직인 민산은 어떠했을까. 민산은 처음에는 전국 조직으로 출발했다.  민산 연수원장을 역임한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을 만나 YS와의 인연, 그리고 노병구 개인의 정치역정을 들어봤다. 1월 12일 을지로 입구역 한 카레요리집에서 늦은 점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최근에 노병구 전 회장은 ‘증보판 김영삼과 박정희’를 발간했다. 변함없이 박정희와 작년말에 화제가 되었던 노태우자서전에 대해 쓴 소리를 늘어놨다. 

-YS계에 몸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 유진산계에 속했습니다. 유진산은 대단한 거물입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YS도 유진산계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나중에 고흥문계가 됩니다. 고흥문이 맨날 같이하자고 제게 말했어요. 반면, YS계 김동영은 'YS와 함께 하자'라고 제게 말했었지요.

결국은 고흥문계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활동이 힘들어졌고, 또 제가 보기에 고흥문이 영 못마땅했을 뿐만 아니라 의견도 맞지 않아서 시골에서 돼지 목장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도동 YS 집에 들렀는데 안에 사람들이 없는 겁니다. 장학로 혼자서 YS 수발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YS가 연금에서 풀려난 즈음인데 YS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줘서 고맙다'라고 했어요. 자기 계보도 아닌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아주 기뻐했어요.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어요.

얼마 후 다시 방문했더니 YS가 '민주광복'이라는 글을 봉투에 넣어 주면서 '내가 요즘 민주산악회 만들어서 산에 다니는데 같이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 갔는데 처음에는 이민우, 최형우 등 20여명이 있었고 나는 따라다니기만 했지요. 그러나 점점 불어나서 나중에 도봉산을 오르는데 선발대가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마지막 후발대는 산 밑에서 출발할 정도로 많았어요.

나중에 제 목장에 장학노가 전화해서 '상도동으로 올라오라'라고 해서 다음날 YS를 만나니 나보고 '민산 조직위원장을 맡아라'라고 하는 겁니다."

-민주산악회에 대한 정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 때 경찰이 산에 올라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형사들이 '산에 무엇 하러 다니냐'라고 물어보고는 했어요. 일반 사람들 같으면 겁이 나서 산에 못 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정당 생활을 해본 사람이기에 '산에 다니는 것 가지고 왜 뭐라고 하시오'라며 무시해 버렸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정치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에 올라가면 우리끼리 모여 민주화에 대해 자유스럽게 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YS는 산을 아주 잘 탔습니다. 그리고, YS가 굉장히 '유머러스'했습니다. 그 때 산에서 밥을 해먹고는 했는데, 각 조별로 4~5명씩 식사를 했습니다. YS는 밥을 빨리 먹은 뒤 각 조를 돌면서 별 얘기를 다했습니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옷차림도 저희들과 똑 같았습니다. 똑같이 배낭 메고 다녔습니다. 제가 YS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건강’입니다.“

-정치입문의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는 원래부터 정치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27세 때 영등포 교회에서 가난한 애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동네 유지들과 자주 만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5·16이 난 뒤에 형사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에 대한 협조를 요구했습니다.

 그 때 학교 이름이 고등공민학교였는데 그 때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싫어했습니다. 나는 '협조 못하겠다'라고 했고 그랬더니 점점 옥죄어왔습니다. 제가 반(反)박정희로 돌아서게 된 계기입니다. 

제가 공화당 조직 서명을 거부하자 경찰서 사찰계에서 매일 와서 괴롭히는 겁니다. 선생 충원도 안되고 그랬습니다. 그 뒤로 저는 마이크를 잡고 박정희를 비판하게 됩니다. 

실질적인 정치입문은 자유당정권의 몰락으로 새로운 현정이 시작되는 1960년 7월 29일의 총선거때 김석원 이사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시작된 것입니다.

이번 제5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영등포 갑구에서 출마를 하는데, 노 교장이 정견 발표회장에서 찬조연설도 해주고 또 청년 학생들을 동원해서 내 선거운동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해주어야 한다면서 간곡히 요청하기에 찬조연설을 하게되어 인연이 되었지요

당시 저는 우범석 동장님을 위해 찬조연설을 한 것이 내 경험의 전부인데, 동회장선거와는 차원이 다른 민의원선거에서 연설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럽고 겁나는 일이어서 정치연설은 자신이 없었지만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자유당 독재에 시달렸던 유권자들은 연중 가장 무더운 7월 한 달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정견발표회장마다 수만 명씩 인산인해를 이루어 김석원 후보의 정견과 윤남하 목사님의 찬조연설과 풋내기인 나의 찬조연설을 경청하고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었지요


연설하는 태도도 연설 내용도 풋내기였던 나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석원 후보도 나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특히 윤남하 목사님의 지도와 격려는 이후 내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데 튼 보탬과 교훈이 되었습니다.

선거결과 당시 서울에 국회의원 선거구가 16개였는데 15개 선거구에서 민주당 공천 후보가 당선되었고, 유일하게 영등포 갑구만 무소속인 김석원 후보가 무려 1만여 표 차로 압승을 거두고 당선되었습니다.

-최근 ‘김영삼과 박정희’ 증보판을 출간하셨는데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보릿고개를 없앤 것도 가난을 물리친 것도 문화수준이 높은 국민이 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민주정부가 출범한지 불과 9개월 만에 전방의 진지를 버리고 총부리를 거꾸로 돌려 서울로 진격해온 사람입니다.

이유는 부패와 무능한 민주당 정권으로는 나라의 안보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정권욕에 불타는 정치군인들이 작당해 헌법을 무시하고, 하극상(下剋上)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 뿐입니다. 쿠데타 후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민주당 정권이 세워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빼앗아 자기가 만든 것처럼 위장도 했구요.

당시 민주당에는 경제계획을 세울 만큼 경제 전문가도 많았고 실행능력도 있어서 박정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정치도 경제도 선진 민주국가로 도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에 시작한 한일회담도 총력외교로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 가면서 더 나은 조건으로 타결했을 것입니다.

물론 경제건설도 빨리 시작되고 더 빠르게 진행 돼 선진국가로 도약했을 것이지요. 물론 보릿고개는 더 빨리 없어졌을 것이고, 박정희의 불법정권 유지를 위해 뿌린 엄청난 부정한 지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돈 만큼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독재의 억압 없이 순리로 명랑한 나라가 됐을 것이고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박정희는‘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오히려 국민의 고통과 나라발전에 후퇴를 가져왔을 뿐인데도 박정희가 제일이라고? 참 한심합니다.

물질만 강조하고 문화가 없다보니 졸부만 양성해 가끔 그들이 국제적인 망신도 시키고 경제의 정상발전도 가로 막을 것입니다.

-노태우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태우가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3000억원을 만들어 줬다"고 하고 "1993년 2월 25일 날 청와대 대통령실 금고에 100억원 이상을 넣어두라고 해 놓고 나왔다"고 썼어요.

‘통치자금’을 후임자에게 전해주려고 기다렸으나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청와대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놓고 나왔다고 합디다.

노태우가 주었다는 3000억원의 기원은 어디입니까? 박정희는 돈으로 독재정권 안보를 위하여 정부에서 수주하는 모든 공사, 외국차관, 은행특별융자 알선을 독점하고 일정금액을 세금 걷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 외에 재벌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많은 돈을 가로채 그 돈으로 소속정당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복종을 강요하면서 수십년 동안 공작정치를 해왔습니다.

노태우가 주었다는 3000억원도 그런 돈인 것입니다.

특히 당 총재인 노태우가 준 돈은 박정희로부터 수십년 동안 내려온 전례(前例)대로 대통령 선거자금으로 당에 준 돈이구요.

김영삼  개인에게 준 돈이 아닙니다. 3당 합당 당시 민자당 계파 비율을 보면 노태우 60% 김종필 15% 도합 75%가 과거 공화당 계열이었습니다.이들이 민자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영삼은 25%의 열세였습니다.

대선자금은 그들에 의해서 모두 공조직의 선거운동에 자금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김영삼이 밉다고 공(公)과 사(私)의 구별없이 혼동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민산은 전국 조직으로 출발했습니까.
"당연하지요. 그 때 민산은 전국 단위 조직으로 기초자치단체마다 지부가 있었고 지부장과 지부 간부들은 모두 연수원에서 ‘심의석’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YS와 함께 한 사람들이 호남 각 지부에 많았어요. 그런데 지역감정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전라도에서 버텨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민산에서 탈퇴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심의석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DJ와 함께 했으면 지역감정 타고 국회의원도 했을 텐데 그렇게 안했습니다. 

신앙적, 정치적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고심했던 사람입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재무부에 있다가 정치를 했는데, 아마 계속 공직에 있었다면 장관까지도 했을 겁니다. 심의석은 민산에서 조직위원도 하고 민산에서 운영하는 연수원 교수도 했던 사람입니다."

-만약 다시 태어나신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원래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대 후에 복학해 서울공업고등하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한국 신학대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려고 했으나, 당시 신길동 성결교회 김성추 담임 목사가 “한국 신학대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이라며 총회신학교나 서울신학대학이 아니면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1차 대학의 지원 기회마저 놓치고 2차인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한 말씀 드리죠. 최근의 학교폭력사태는 다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이게 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경제제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은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이상의 실현과 선진을 위하    여 필요를, 그 필요가 수요를 낳고, 수요는 공급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문화부터 선진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언론보도 경향을 보면 경멸하고 싶습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우선순위가 경제부터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목회자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문화선진국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한나라당이 쇄신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한나라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요한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 있다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누가 누구한테 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국회의원 당선만 되면 국민의 소리 외면하고 차기 공천만 생각합니다.

지금 18대 국회의원들 이명박 정부 출범때부터 딴지 걸고, 차기 공천을 받기위해 대선후보에게 줄서기에만 신경써왔던 것입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국회의원 딱 한번만 할 생각해라”   대선후보에게 줄서서 받을 차기 공천에만 신경쓰지 말고, 정정당당히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들에 의해 평가 받을 생각하라고요.

-김현철씨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YS가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해온 것은 다 아는 일 아닙니까?  그런 YS의 자식인 현철씨에게 한번쯤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가 아닌 의정활동으로 평가 받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YS는 정치는 목숨을 내놓고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정치로 잘 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키운 아버지의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현철씨에게도 한번 기회를 주어서 맡겨보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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