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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화·사교육 조장’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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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화·사교육 조장’ 부추긴다
  • 박정아 자유기고가
  • 승인 2008.03.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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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부활 중학교 신입생 ‘일제고사’

학생은 부담, 교사는 교육과정 파행 우려
반발여론 확산 불구, 교육 당국은 ‘강행’
2001년 美서 진행했던 교육개혁과 닮은꼴

10년 만에 중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일제고사가 실시됐다. 16개 시ㆍ도교육청은 지난 6일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개 과목에 걸쳐 서울시교육청이 개발한 5지 선다형 문항으로 전국연합 진단평가를 실시했다.

서울 등 일부 교육청은 진단평가 결과를 공개, 성적표에 각 과목의 학교내 및 시ㆍ도내 석차백분율 및 등급 등을 표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평가의 결과를 토대로 각 학교는 신입생 수준에 맞는 학습방법을 모색하고 기초학력 및 교과학습 부진학생을 파악하는 데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교조와 교육단체들은 “이는 학교와 학생의 서열화를 부추기고 사교육비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강력 비난하고 있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교육 당국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려면 진단평가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교육·시민단체들은 서열화와 사교육 조장을 우려하며 반발하고 있다.

◇개별 성적 공개 논란

전국 16개 시·도교육청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35분까지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개 과목 시험을 치렀다. 진단평가는 지난해 9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합의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이 개발한 문항을 활용했다. 과목당 25개 문항으로 문항당 배점은 4점이며 5지선다형이다.

진단평가 결과는 학생에게 개인 성적표로 통보된다. 시·도교육청마다 성적표에 기재되는 세부 정보는 다를 수 있다. 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문항 출제만 돌아가며 맡되 성적처리 및 통지 방식 등은 자체 계획에 따라 시행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개인 성적표에 과목별 점수와 관내 응시생 평균점수, 과목별 석차백분율 등이 기재된다.

석차백분율이란 전체 응시생 집단을 100으로 놓았을 때 자신의 점수가 몇 %에 해당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전체 응시생의 문항별 정답률(반응률)과 해당 학생이 그 문제를 맞혔는지 여부도 성적표에 표시된다. 5개 과목을 합산한 평균점수나 전체 석차 등은 제공되지 않는다.

◇반발여론 불구, 교육당국은 ‘강행’

교육 당국은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선 진단평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교육은 학생이 어떤 수준인지 정확히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며 “아이들의 기초학력을 파악해 수준에 맞는 학습법을 개발하는 데 진단평가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는 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진단평가는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일제고사 형태로 전국 모든 초·중학생의 개인별·학교별 성적과 지역단위 석차 백분율이 제공된다”며 “개인별 순위까지 공개하는 것은 반교육적 인권 침해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진단평가를 철회하지 않으면 사이버 운동을 전개하고 학생·학부모 소송단을 구성해 법적 대응도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시민단체인 ‘학벌없는사회’도 “일제고사는 입시 스트레스에 허덕이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빙자한 폭력”이라며 “성적이 공개되면 학생과 학교의 석차경쟁이 벌어지고 결국 사교육 경쟁으로 비화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시교육청은 이에 대해 “개인에게 과목별 성적 정보만 제공할 뿐 다른 학생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순위경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전국 단위 진단평가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11일에는 전국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개 과목에 대한 진단평가가 실시될 예정이다.

◇기초 학력 올린다고? ‘글쎄’

이번 진단평가는 지난해 2월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 시험이 사실상 이명박 정부가 몰고 올 교육 개혁의 시금석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지난 2001년 이후 부시 행정부가 진행했던 미국의 ‘교육 개혁’과 그 양상이 똑 닮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적 개혁이 지속돼 왔던 미국의 교육 정책은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큰 변화가 일었다. 1965년 이후 유지돼 왔던 ‘초중등교육법 개정법’이 국회에서 통과됐기 때문이다. ‘전원성취교육법’, 또는 ‘낙제학생방지법’(the No Child Left Behind Act·NCLB)이라고도 불린 이 법은 ‘경쟁과 선택의 원리’를 기존 법에 대거 도입했다.

그중에서도 핵심 사안은 매해 3학년부터 8학년까지 학생을 상대로 ‘표준화 학력 검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소수인종 등의 연간 성취도 증가 보고를 의무화한다고 명시했다. 또 학업 성적, 학업 진보 정도, 각 학생집단 간 학업 차이 증감에 따른 체계적인 상벌 시스템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학교별 성적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임재훈 교수는 지난 2005년 11월 <우리교육>에 기고한 글에서 “이 같은 학력 검사는 기존에 주정부나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업 상태나 진보 상황 등을 평가하는 자료로만 쓰이던 이전 학력 검사와 달리 학교의 효율성과 교사의 질을 평가하는 직접적인 잣대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학교의 학업 성취도 결과에 따라 교장의 학교 운영 효율성이 평가되는 상황에서 미국 내 일선 교장 및 교사들은 학생들의 시험 성적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가난한 지역의 학교,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평균 이하인 학교에서 이런 양상은 더욱 심했다.

임재훈 교수는 “일부 학교에서는 1년에 7~8차례에 걸쳐 표준화 학력 검사를 치르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도 시험 2주 전부터 카운트다운 표시를 학교 현관에 붙여 교사와 학생 모두를 긴장하게 하기도 했다”며 “일부 도심 학교에서는 학교 성적을 높이기 위해 시험을 잘 못 볼 것 같은 아이들을 시험 당일에 일부러 결석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밝혔다.
 
매년 3~4월 시행되는 표준화 학력 검사는 이제 미국의 학생, 교사 모두를 긴장하게 만드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교육 개편 5대 실천 과제 중 하나로 내놓았던 ‘기초학력·바른 인성 책임 교육제’는 NCLB의 ‘한국형 복사판’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학교가 책임지고 학습부진 학생들의 학력을 끌어 올리겠다”는 목표 아래 현재 표본을 추출해 실시하고 있는 학력진단평가를 전국 초등학생을 상대로 확대해 시행하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를 평가해 그 결과를 공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같은 새 정부의 정책 방침에 시도교육감들도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25일 열린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회장 공정택 서울특별시 교육감) 창립총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학교별 학력 정보 공개를 추진하겠다”며 관련 법령을 정비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평준화를 폐지하고 ‘고교등급제’를 부활시키겠다는 주장에 다름없다.

◇학생은 부담, 교사는 교육과정 파행 우려

학력 서열화 논란이 일고 있는 진단 평가 실시로 학생들은 석차공개에 대한 부담감을 나타냈고 교사들은 교육과정의 파행운영 가능성을 들며 우려를 나타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5개 과목에서 학생들의 학습 준비 상황을 점검하는 진단고사 시험은 같은 학년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일제고사’이다.

그동안 교육시민단체들은 전국의 모든 학생들의 성적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학력 서열화가 부추겨진다며 우려를 나타내왔다.

실제로 시험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은 같은 학교 친구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창덕여중 이지현 학생은 “전국 등수가 쫙 나오니까 ‘나는 이렇게 못하는구나’ 잘하는 친구들 보면 또 ‘나는 저렇게 안되겠구나’ 생각하며 열등감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내신에 반영이 안 되는 점 때문에 학생들이 시험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 진단평가의 본래 의미조차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창덕여중 김하나 학생은 “내신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왜 이런 시험을 치는지 모르겠다”며 “아이들도 찍고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연아 학생 역시 “국가가 학생들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냐”며 “석차가 매겨져도 상관 없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은 학교수업이 진단평가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교육과정이 파행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경계했다. 일선의 한 교사는 “학생들 수준에 맞춰 지도하는 게 아니라 진단평가에서 다루는 내용을 모두 다 다뤄야 한다”며 “교사 입장에서는 가지고 있던 편성권이 없어진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도교육청은 학생들의 실력을 파악해 수준별 학습활동을 벌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험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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