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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魔 입고 500년 지났지만 단아하고 예스런 멋 ‘물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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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魔 입고 500년 지났지만 단아하고 예스런 멋 ‘물씬’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16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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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명소 ‘정여창 고택’을 찾아서

드라마 ‘토지’ 촬영하며 관광객 발길 이어져
솟을대문·운치 깃든 소나무등 볼거리도 풍성

사랑채 앞마당 숲처럼 꾸며 ‘대웅전’에 온듯
계단주위 인동초 심어 생기있고 신선감 가득

조선시대에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이란 말이 있었다. 학문과 문벌의 자부심이 대단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 안동과 함양이었다. 함양의 문벌과 가문을 대표하는 명소가 일두 정여창 고택이다. 정여창 고택은 1984년 중요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돼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함양 정병호 가옥’으로 등록돼 있다.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할 때 등기부상 소유자 이름으로 명칭을 붙였기 때문이다. 정여창이 이 집에서 실제 산 기간은 오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택은 3,000여 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이었지만 화재 등으로 소실되고 현재 12동임)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양반 댁의 출입문에 해당)에 충, 효 정려 편액(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던 일) 5점이 걸려 있어 정여창 고택의 유서 깊음을 알게 한다.

정여창 고택이 있는 마을을 그 지역에서는 개평리(介坪理)라고 부른다. 개평마을은 그 생김새가 댓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두 정여창은 1450년(세종 32년) 정육을(鄭六乙)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하동에서 살아오다 증조할아버지인 정지의(鄭之義)가 개평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정여창은 8세 때 의주통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의주로 갔는데 당시 정육을의 집에 명나라 사신 ‘장영’이란 사람이 찾아 온 적이 있었다. 정육을은 장영에게 아들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자 사신은 여창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여창(汝昌)은 장차 집안이 번성하고 길이 번영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행실은 돈독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8세 되던해 아버지가 이시애 난을 평정하기 위해 싸우다 순직하자 소식을 듣고 달려가 한 달간이나 아버지 시신을 찾아 전쟁터를 헤매다 겨우 찾아 고향으로 모셨다.

이 때 조정에서는 부친의 공을 높이 사 아들인 자신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지만 정여창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릴 수 없다며 벼슬을 사양했다고 전한다.

아버지를 여읜 정여창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당시 김굉필과 함께 당대의 명유로 칭송받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 1480년에는 성종이 성균관에 글을 내려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는 정여창을 제일로 추천하기도 했다.

정여창은 성균관에 올라가 학문에 정진하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다시 함양으로 내여와 3년상을 치렀다. 상복을 벗고도 서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무오사화 때는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는 아픔을 겪었고 7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다 1504년 55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던 일.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 명예를 회복했다. 정여창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도 추앙되고 있다.

동방오현은 조선 성리학자 중에서도 공자의 묘인 문묘에 배향된 다섯 사람을 말하는데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그들이다.

정여창은 살아서는 함양 땅에서 오랜 기간 살지 못했지만 세상을 떠난 후 고향인 함양 수동면 우명리 남계서원 뒷산에 묻혔다. 정여창 고택은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가  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부터 많은 문화 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여창의 일생을 살펴보면 왜 함양이 가문과 문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여창 고택은 지어진지 500년 가까이 됐지만 보존 상태가 뛰어나 전통한옥의 품격을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 중건했다.

정여창 고택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솟을 대문이 눈에 확 들어온다. 솟을 대문의 기품은 흡사 궁궐의 그것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솟을 대문을 들어가면 바로 동향으로 지은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 (百世淸風)’ 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퇴색한 채로 붙어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ㄱ 자 팔작지붕으로 돌축대 위에 높직이 올라앉아 양반가옥의 품위와 권위를 잘 살리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사랑채의 축대를 높여서 안채, 아래채와 수평을 반듯하게 맞추었다는 가옥구조를 보면 단순하면서도 예스런 멋이 풍기는 고택임을 알 수 있다. 내부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하다.

또한 사랑채 앞마당 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 돌로 만든 인공 산)을 꾸며놓고 집터에 달린 숲처럼 아름답게 가꿨다. 보통은 주로 후원에 꾸미고 앞마당에는 평평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지만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게 꾸몄다.

사랑채 앞마당은 넓다랗다. 마치 클 절의 대웅전 앞마당을 연상시킨다. 숲처럼 잘 꾸며놓았다. 사랑채로 올라가는 계단 주위로 키 작은 인동초를 심어 놓아 사랑채 전체가 생기가 있어 보여 보는 이들에게 신선감을 준다. 오른쪽에 서있는 소나무도 한결 운치를 돋운다. 사랑채는 현소유자 정병호의 고조부가 중건했다고 한다.

사랑채를 옆으로 돌아가면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을 거치고 다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문이 따로 있어 양반 고택으로서의 권위를 느끼게 한다. 일각문 옆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채가 있어 이곳에 오랜 세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는 왼쪽에 아래채가 있고 안채 뒷편에 가묘와 별당 안 사랑채가 위치한다. 안채는 시야가 넓게 트여 건물이 한 눈에 들어 오며  안 마당은 넓고 반듯하다.

마당 가운데에는 둥근 돌로 쌓은 우물이 있어 정취가 느껴진다. 안채 마당에는 잔디를 곱게 심어 잘 관리돼 있다. 안채의 건축연대는 사랑채보다 더 오래돼 300년 전 청하현감을 지낸 선조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500여 년 전 처음 지어지기 시작해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했고 화마를 입기도 한 정여창 고택은 현재는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을 뿐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고택 구석구석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누군가 그 안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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