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내 와인하우스를 겸한, 1인 스터디 및 여러 강연과 소모임, 공연 관람이 가능한 1석 3조의 중소형 동네 서점.
(시사캐스트, SISACAST= 양태진 기자)
누군가의 이야기가 스민 종잇장을 톡톡 건드리다 보면, 시공간을 깨고 나온 상상이 언어의 심연을 유영하다, 잊고 있던 제 감성과 마주한다.
미지(未知)의 책 속 세상 얘기다.
한 권의 책으로 기쁨과 슬픔을 얘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감정의 굽이침으로 혜안(慧眼)에 이른 호수는 지금도 유효한 곳이 되어있지만, 요즘 대세라는 인터넷 영상과 현란한 음악들로 넘쳐난 냇물은, 왠만한 자극 아니고선 쉬이 와닿지 않는, 이리 패이고 저리 패이다 못해 다소 무뎌진 감각의 골짜기만을 양산해 냈다.
생각을 덧대 볼 겨를도 없이, 언어의 물감마저 덜 마른 채로 스쳐가는 수많은 영상과 오디오물, 그밖의 오락적(娛樂的) 여가 생활로 우린, 거친 욕망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고,
헛헛한 기운이 잡아끄는 대로 결국, 방향키 만을 부여잡은 채 긴 망원경을 꺼내어 들 듯, 삶의 지침이 되어줄 책 한 권 조심스레 끄집어내는 것이다.
독서 이외의 활동이 불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시도들이 해당 영역을 확장시켜 주는 것 처럼, 일상에 주어지는 다채로운 체험들이 독서로서 뿌리내린 삶의 외연을 확대해 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삶의 기저에 책을 두고 있느냐는 것. 저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나름의 언어적 심미안(審美眼)만큼은 지켜내야 할 것이기에, 미묘함과 모순으로 휩싸인 이 세상을 좀 더 깊이 사고하고, 균형감 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독서는 삶의 중심에 꼭꼭 심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책들과의 첫만남에 있어 우연인듯 필연처럼 다가와, 입맛 잃은 독서욕(讀書欲)을 일정부분 자극해 주는 곳이 바로 동네의 크고 작은 서점들인 것.
명실상부한 종합 장서(藏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대형 서점은 물론이요, 지역 내 이동 편의성과 책을 고르고 찾는데 보다 더 진지한 안내와 지침을 제공해 주기도하는 중소형 책방들은 이러한 필요성 측면에서 저마다의 사명감을 안고 존재해 온 것이다.
이 바람을 타고, 옛 궁궐의 역사가 진눈깨비처럼 내려앉은 어느 세종마을(이하, 서촌) 골목 사이,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역사의 수레바퀴*'와 함께, 커피나 와인을 닮은 꽤나 고급스런 책방 하나가 약 일년 반 전,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 책방'.
경복궁의 영추문* 근처에 자리한 이곳은 동네서점이라는 본연의 가치와 더불어, 역사를 통해 인류의 이상(理想)을 반추해 볼 수도 있을거라는 역사학의 핵심 대전제 아래, 그 굴레를 제대로 인식하여 새로 만들어질 역사가 과거를 '역지사지' 해 볼 수 있도록 돕는, 역사 전문 서점으로서의 올곧은 입지를 당당히 구축해 가고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 : 역사의 발전과 변화, 그 되돌이킬 수 없는 진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역사를 정의할 때마다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다.
*영추문 : 경복궁의 '서문(西門)'으로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하던 문으로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다시 건립하였다가, 1926년 일제강점기 속 그 문 앞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던 바, 그 진동 때문에 다시 무너졌던 것으로 추정, 이에 다시 1975년 원래의 위치보다 남쪽에 건립된 이후, 43년 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2018년 12월에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두산백과 발췌.)
"처음 이곳을 열기까지 저 나름대로의 생각과 고민이 많았습니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저 또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러던 중, 저의 관심사와 더불어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뭔가 큰 의미를 전할 수도 있는 일에, 작지만 큰 도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서울대 역사학과을 졸업한 뒤, '역사책방'을 내기까지 대기업의 임원 등을 두루 거쳐 온 백영란 대표의 말이다.
"결국 경복궁 근처, 정확히는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관통하며 주요 역사의 숨결이 흐르고 있는 이 곳에 책방을 내기로 결심했던 거죠. 관광 명소인 북촌과 더불어 현재 이곳 서촌* 또한, 옛 한옥을 중심으로 골목과 골목 사이 수많은 거점 속, 옛 왕족과 현대의 여러 예술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온기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던 부분에서 나름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바삐 가던 세상이 잠시나마 놓쳐버린, 대한민국 역사의 큰 틀 속, 하나의 빈 축을 발견, 이에 끼워 넣으려는 백 대표만의 '역사책방 수레바퀴'가 제 본연의 의미 또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듯 했다.
*서촌(西村) : 서울 종로구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북구에 속하며 흔히, '장의동'이나 '장동', '우대'로 불렸다. 조선 시대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도 유명했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엔 문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자리잡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규제를 받아 쇠퇴하였으나,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 세종마을(世宗―)로도 불리며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위키백과 발췌.)
'역사의 수레바퀴'가 담고 있는, 똑같은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란, 그간 겪어온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임에도, '역사책방'을 방문하는 모든 개개인의 삶에 적용 가능함과 더불어, 시간의 흐름과 연계된 모든 것에도 쓰일 수 있는 말인 것처럼,
이곳의 서적 대부분은 역사 의식을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 인간 내면의 역사로 인식될 다양한 철학과 인문 교양서들에도 일정 부분 비중을 두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재고가 없는 책은 따로 주문이 가능하니, 직접 책방에 들러 책을 받아보길 원하는 아날로그형 독자들의 경우, 이를 한 번 쯤은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오랜 역사를 다룬 책들에 둘러싸여 신간 서적 몇 권을 탐하다 보니, 그 신선한 내음 폴폴 풍기는 책 속에 머무르고 싶은 맘 간절해졌다.
이에 근처 테이블로 책을 가져가 앉고 싶었지만, 새 책을 그것도 가격 지불 없이,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탐하려는 것은 내 스스로의 양심에도 거스르는 일.
이곳의 방침 또한 그것을 당부하고 있거니와, 한 잔의 음료와 더불어 충분한 여유 또한 지불할 의사가 있을 때, 새 책들은 그들의 진정한 리그를 제대로 펼쳐 보여 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느새 주문한 음료가 온 몸을 간지럽히며, 책과 하나 되려는 맘속 온 감각을 일깨운다. 일종의 전율이다. 전혀 몰랐던 이와의 새로운 만남에서 찾아오는 희열. 이러한 경험을 혼자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뭘까.
특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어느 한 곳에 발이 묶일 필요가 없는, 그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서의 관망(觀望)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사는 위대한 것 아닐까? 아니, 역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더 그렇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나온 역사를 한번에 담아낸 역사가들이 진정 위대한 것 아닌지. 거대한 화폭에 담긴 명화(名畫)를 발굴해 낸 위대한 고고학자들처럼 말이다.
"수많은 책 속의 사람들과 언제 어디든 함께 거닐며 얘기 나눌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라 생각해요. 실제 여행은 고생이 담보되는 것이지만, 상상이라는 날개로 훨훨 날으며 할 수 있는 이 여행이야말로, 누구나 최소의 가격을 지불한 뒤 누려볼 법한, 아주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여행 또한 취미삼아 즐긴다는 백 대표는 얼마 전에도 터키를 방문해 여러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재통합된 이후,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철옹성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을 함락시키면서, 제국의 수도가 재탄생되었다고 하죠. 현재 터키의 최대도시인 '이스탄불' 얘기입니다. 당시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동•서양의 문화가 제대로 융합된 '실크로드(Silk Road)*'의 면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어요. 다양한 물품의 교역을 넘어, 인종까지도 뒤섞이면서 문화 유통의 실핏줄 같은 통로가 활발히 개척되었던 곳이죠.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다보면, '역사책방'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와 소통도 무척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시간의 누적을 감내해 온 역사의 위대함이 하나의 공간에서 읽힐 수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실크로드 : '비단길'로도 불리는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기원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만 여겨져 왔으나, 최근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뒤따르면서,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한 수만 갈래의 범세계적인 그물망 모양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위키백과 발췌.)
또 하나의 교류와 소통 방식에 있어, 이곳 책방의 메인홀에서는 주기적인 강연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명 저자들의 초빙과 직접 강연자로 나선 작가들의 적극적인 지식나눔이 서촌의 저녁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오랜 교류의 역사를 들춰봐도, 모든 문물이동의 원천에는 상업적인 교역 방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서로의 이익이 공유될 때에만 소통이 가능했다고도 풀이될 수 있는데요. 이곳 역사책방은 사람끼리 교류하는 곳입니다. 보이지 않는 지식을 서로에게 나눠주며 역사의 본질을 함께 향유하는 곳이죠. 지식 자체에는 특별한 가격을 매기지 않습니다. 이 공간만으로 창출할 수 있는 소득에 제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저 기본만 유지되는 정도에서 오로지 책을 통해 얻는 시민들의 깨어남에 제 이익과 행복의 근원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후,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산다"가 그녀 자신의 모토이자, 철학이라는 말로 백 대표와의 짧은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누군가를 위한 글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듯, 책으로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것도 책방이 하는 일일 터, 그 터전의 역할을 '하고 싶은 일'로 자처하고 나선 이 '역사책방' 만의 따뜻한 시선은 긴 추억 안에 맴도는 짧은 언어의 향기처럼 짙은 기억을 선사해 주었다.
작은 깨달음이란 없다. 그저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 작은 서점 또한 없다. 지친 맘이 지나침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책방 속 이야기들은 항상 차고 넘치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사실상 수리가 필요 없었다. 다만 굴러가고 있을 뿐. 우리의 깨달음도 그저 굴러가는데에 정착할 수 있기를. 나만의 역사도 곧 이루어질 것만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