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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지옥’ 일제시대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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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지옥’ 일제시대 때도 있었다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7.04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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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공부못해 자살하는 학생 속출
6-7세 아동들도 초등학교 입시경쟁률

최소 2대1서 명문은 6대1까지 치솟아
부모들 선행교육 경쟁등 지금보다 더해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3일 천하이긴 하지만 정권을 잡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혁명정강을 발표한다. 그 중 하나는 ‘반상의 철폐’다. 신분제를 없앤다는 것이다. 신분제를 지탱하는 근간 중의 하나는 교육의 불평등이었다.

지배계층은 교육을 독점하며 자신들의 가치관과 우월의식을 강화해 나갔고 피지배계층은 교육의 기회로부터 유리돼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근대 교육제도가 강제적으로 한반도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목표는 완전한 식민지 국민 양성에 있었다.

합방과 동시에 각급 학교장은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교원은 제복에 착검한 상태로 수업에 임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자제에게 차별교육을 실시하면서 교육기관은 일어(日語) 해독을 할 정도의 보통교육과 성급한 기술양성을 위한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제 시대가 되면서 이전의 반상의 차별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로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차별을 받는 한국인 내부에서도 교육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분배됐다. 돈이 없으면 보통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설립됐지만 한국인의 입학은 극히 제한돼 그 혜택은 별로 받지 못한 채 문화정치 이후 사립학교 설치가 다소 완화된 것을 기회로 민족지도자 및 외국 선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사립학교, 즉 연희전문(현 연세대), 보성전문(현 고려대), 불교전문(현 동국대) 등에서 교육받았다.

일제는 오히려 한국인 학생들의 일본 유학을 음성적으로 유도해 1931년의 일본 유학생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는데 이 시기의 미국 유학생은 490여 명이었다. 서구의 근대사상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번역문화를 통해서 섭취되게 마련이었다.

학제는 보통학교 6년, 중학교 5년(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한 학교 형태), 전문학교 3년, 대학교 4년으로 제정됐으며, 그밖에 실업학교, 사범학교를 두었다.

한편 교과과정은 초기에 국사와 우리말의 강의를 허용하다가 일제는 중일전쟁(1937) 무렵부터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국사와 우리말 강의를 철폐하고 학교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고, 심지어는 일부 남학교를 여학교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보통학교 아동들에게까지 ‘국어(일본어)상용’ 이란 표어를 내걸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등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운동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11년 8월에 칙령 제229호로서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는데, 그 골자는 총독의 인가 없이는 어떠한 학교도 설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교과서도 총독부에서 편찬하여 식민지 교육제도를 다져 나갔다.

1919년부터 4년간은 3면에 1개 교를 표준으로 삼았으나 1929년부터 8년간은 일면일교(一面一校)를 목표로 증설하는 한편, 이와 병행해 수업연한을 연장했다.

또한 1938년 3월에는 세 번째로 교육령을 개정했는데 그 중요 골자는 교명을 일인학교와 똑같게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 하고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라 하였으며, 여자고등학교를 고등여학교(약칭 ‘高女’)라 개칭했다.

한편,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했는데 이것은 결국 한글 폐지를 의미한 것이며 소위 삼대 교육방침이라 하여 국체명징(國體明澄),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훈련(忍苦訓練)을 모든 학생들에게 전시 사상교육으로 시행해 황국신민의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1941년 4월에는 심상소학교를 국민학교라 개칭하고, 1943년 10월 4차로 개정된 교육령에 따라 교육체제를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목적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이 령은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으로 국민학교는 대륙침략에 이용하는 병사의 준비와 관련해서 의무교육제의 준비를 실시하고, 중학교는 일본에 준해서 조치하고, 제국대학 예과는 문과의 정원을 최소한으로 감소시켰다.

한편 이공과의 정원을 증가시켰으며, 의과계통의 사립 전문학교는 의과계통의 학교로 바꾸는 동시에 잔여 문과계통의 전문학교는 통합했다. 또한 문과계통의 여자 전문학교는 여자 실무자 또는 여자 지방보도원의 양성을 위하여 교육하도록 개정됐다.

이리하여 교육의 양상은 일본의 전쟁에 긴박감이 가해지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다녔던 전문학교는 설립취지와는 달리 강제적으로 운영 방침을 바꾸게 됐다. 학교는 폐쇄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모든 교육이 정규교육보다 근로봉사, 생산증강, 방공호 구축작업과 군사훈련에만 더 바빴다.

일제시대 한국인의 교육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도구 역할을 하며 교육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왜곡되고 있었지만 또 다른 병폐는 ‘입시지옥’이었다. 현재의 입시 지옥과는 사뭇 다르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으로 모든 국민이 초등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역시 누구에게나 문호가 개방돼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대학이 나서서 학생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일제시대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입시 지옥은 먼 옛 이야기가 된 듯하다. 지금도 간혹 10대 청소년이나 대학생이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기 못해서 혹은 원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자살을 택하는 비극적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러나 1920~30년대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입시 실패로 자살을 택했다면 다소 의외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그 부모도 좌절과 절망으로 자살을 택하는 예가 속출했다.

1925년 3월12일, 교복 차림의 19세 청년이 경기도 부천의 한 야산에서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사체에서는 경기 사범학교 수험표가 발견됐고 수험번호만 적혀 있을 뿐 이름은 없었다. 경기 사범학교에 수험번호를 조회한 결과 이인복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는 사범학교 입시에 실패한 것에 절망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사체가 발견된 주위에서는 양잿물과 구두끈이 함께 발견됐다. 자살 과정을 알려 주는 증거물들로 먼저 양잿물을 마시고 죽으려 하다 용기를 못해 구두끈을 풀어 목을 맸지만 구두끈이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끊어져 다시 혁대를 풀어 기어이 목을 매 죽은 것이다.

입시를 비관해 자살한 청년은 이인복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2년 앞서 서울 체부동에 사는 18세 청년 박경복이 양잿물을 마셨다.

박경복은 1922년 3월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연속 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고보 삼수생’이었다. 입학시험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온 1923년 10월14일, 박경복은 양잿물을 들이켜고 이틀 동안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살 충동은 남학생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1925년 4월11일 밤 8시, 서울 가회동에 사는 19세 여학생 정국만이 한강 인도교로 나가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그해 3월 이화학당 입학시험에 떨어진 정국만은 절망과 수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한강으로 뛰어내리기 직전, 순찰 중이던 인도교파출소 경관에게 발견돼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입시경쟁은 서울과 지방이 별 차이가 없었다. 1928년 3월, 평안북도 강계군에 사는 21세 청년 유찬수는 춘천고보 입학시험에 응시하려고 불원천리 춘천까지 달려왔다. 그해 춘천고보 지원자 숫자는 지난해보다 두 배나 늘었다.

유찬수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떨며 코앞에 다가온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입학시험이 치러진 3월13일, 유찬수는 시험장에 나갔다가 연령 초과라는 이유로 시험을 치러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유찬수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세상을 비관하다가 끝내 독약을 들이켰다.
 
여관 주인이 신음하는 유찬수를 발견하고 즉시 강원도 도립병원으로 호송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독약에 목구멍이 녹아내려 평생 말 못하는 불구자로 살았다.

1931년 쥐약을 먹고 자살한 16세 소년 김재기, 1933년 경부선 제204호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양산보통학교 5학년생 이창석, 1935년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19세 청년 윤학병, 1936년 수백 척 벼랑에서 투신자살한 17세 청년 김홍배, 1938년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 16세 청년 이해정, 1939년 역시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 14세 소년 우석규, 1940년 다량의 칼모틴을 마시고 자살한 18세 청년 정정모 등. 해마다 입시철이면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6~7세 아이들도 입시지옥의 희생양이었다. 1910년대 초반에는 일반 한국인에게 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입학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수업료를 면제해 주고 기본적인 학용품을 제공해 줬다.

그러나 배워야 사람 노릇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초등학교 입시 경쟁률이 점점 치열해져 최소 2:1, 최대 5~6:1의 경쟁률을 기록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선행 교육을 시키는 학부모들이 생겨났고 점차 부유층에게만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초등학교 입학시험 문제 중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있다. 입학 대상자 아이에게 당시 1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고 무엇인지 알아 맞추라는 문제였다.

일제시대 초등 교원의 월급이 50원 내외였으니 100원 지폐를 실제로 본 사람은 부호가 아니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다. 더구나 6~7세 어린 아이라면 더욱 100원 지폐를 보았을 리 만무했다.

이 문제가 알려지면서 초등 입시에 실패한 아이의 부모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문제의 변별력이 탁월해 그 다음해 입시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출제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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